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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Jul 17. 2023

읽고, 읽히는 마음

누적된 어제들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맹목적이고 정기적으로 글을 써나갈 수 있을까


 특별히 맛있는 반찬 없어도 무사하게 밥상을 맞듯이, 보고 싶던 영화 개봉일을 못 버티고 잘 차려진 상영작 중 하나 골라 시간 보낼 요량으로, 의무나 기대 없이 행해지는 일정한 루틴처럼, 일상 속 쓰기를 자연스레 녹여내는 일에 오래 간절해왔다.

 빼어난 7첩 반상이나 에피소드는 없더라도 차곡히 쌓여가는 어제를 기록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지면 위를 순항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키는 소설을 집필할 때 자기 안의 캐비닛을 열어 여러 개의 서랍 중 필요한 기억을 꺼내어 쓰는 일에 능하다고 한다. 그는 전업작가로 살며 어떤 서랍에 어느 기억이 들어있는지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고, 필요한 순간에 거의 반사적으로 서랍이 열리며 요긴한 기억들이 나온다고 한다.


 쓰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가 따라야 한다는 자발적 강요를 내려놓고, 매일 정해진 분량을 끊임없이 고치고 덮을 생각으로 대강 쓰는 것, 잘 쓰든 못쓰든 빈 화면을 우선 채워가는 일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까지 감내해야 하는 말 못할 고충이 뒤따른다.


 독자 입장에서 믿고 보는 작가의 신작은 제목과 목차만 쓱 훑고도 깊이 감응하여 마음이 복작거리곤 한다. 한 작가의 세계관이 눈에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그가 날 배신할 리 없다는 신념을 품는 충성도 높은 쪽에 속한다. 그렇다 보니 작품 속 에피소드의 경중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작자의 관점 위주로 읽히는 편이다.


 열광하는 것이 드라마틱한 소재가 아닌 이상, 특별한 재료 없이도 하루를 뚝딱거릴 수 있는 평범함이야말로 핵심 글감의 원천 아닐까. 작은 것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꾸준히 누적되어 한 사람의 세계관을 이룬다. 그러니 잠시 스치는 사소한 감정일지라도 여과 없이 기록해 보자.

 매일 되풀이되는 일과지만 어제와는 다른 태도를 취해보며 삶의 루틴에 약간의 변주를 가미하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미처 품지 못한 일들을 구상할지 모를 일이다.




 어제 밤잠 아껴가며 늦도록 친구와 나눈 이야기들이 어쩌면 오늘의 나를 일구고, 사실은 오래 참아왔던 말을 어제보다 호기롭게 실토하기도 한다. 결국 숱한 어제를 헤쳐 나간 힘에 보태진 오늘이, 다시 내일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단절과 연결의 연속선상에서 늘 마음깊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꾸준함과 기록뿐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날이 많아 게으름에 고개를 떨구는 것뿐 틈만 나면, 틈 나지 않을 때도, 너무 달거나 고되지 않은 하루 끝에도 구차한 변명 대신 침잠하여 묵묵히 쓰는 인간이고 싶다.



사진: Unsplash@Kelly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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