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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Feb 01. 2024

책이 다시 내게로 왔다

도서관은 어디에나

  다시 책 읽기에 재미가 생기면서 아이가 등교하고 나면 나 또한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아이가 읽을 만한 동화책들을 살펴보았다. 예쁜 그림과 쉬운 표현의 글이 많아 잘 읽혔다. 특히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라는 책이 좋았다. 많은 글 없이 파랗게 표현된 날씨와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 어우러져 눈이 즐거웠다. 귀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담긴 책이 좋아, 한 장 한 장 소중히 들여다보았다. 보물을 발견한 듯 신이 나 잔뜩 책을 빌려 가는 날이 많았다. 때로는 아이가 시큰둥해하는 책들이 있어 당황하기도 했다.


  집에서도 책 읽는 시간이 늘다 보니 어느새 내 아이도 책에 관심이 생겼다. 내가 무언가 읽고 있으면 궁금해하며 내용을 물어보았다. 어느 날은 본인이 읽을 책을 골라 옆에 엎드려 함께 보았다. 동화책은 대부분 나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많았다. 상대와의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엄마들과의 관계에서 말과 태도에 상처받고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양육 방식의 차이일 때도 있었고 내 행동에 대한 상대의 평가일 때도 있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거나 어쩌면 생각 없이 한 말과 행동이었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고요하게 지나갔지만, 내면에서는 방어하듯 반응했다. 결론은 항상 그 사람을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 중 한쪽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런 결론조차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한 건 아니었다. 반대로 내가 오해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하며 스스로에 향하는 비난도 컸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그런 문제로 자책하는 시간이 많았다. 동화책 속 주인공들은 어린 나를 대하듯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여름의 더위도 점차 풀릴 무렵, 예전에 좋아했던 책과 저자를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주로 일상생활을 담은 수필에 눈이 갔는데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무레 요코의 책이 그 시작이었다.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이라는 책에는 그녀의 아흔 살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엄청난 사건이나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은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듯 말하고 일기처럼 생각을 표현했다. 딸이 사는 도쿄에 혼자 올라온 이야기가 있었다. 관심 있게 본 곳들을 죽기 전에 다 둘러보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도쿄돔을 보러 간 할머니에게 안내원이 연세를 생각해 신사를 구경하러 가시라 권하자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난처해하는 안내원의 표정과 도쿄돔에서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구경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주변에 호기심을 갖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바로 실행하는 할머니를 보며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변화 없는 엄마의 삶이 당연하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한 말이었다. 당장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보면 어떨지 하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에도 나는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근처 공원이나 뒷산을 갔다. 가을 무렵이라 어디를 가든 예쁜 산책길이었다. 이후에는 거리가 먼 곳에 갈 일이 있어도 걸었다. 한두 시간 먼저 길을 나서면 갈 만한 거리였다. 중간중간 쉬어가며 책을 읽다 보면 어디든 도서관이 되었다. 한 권씩 책을 끝낼 때마다 성취감도 느꼈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내 안에 쌓이니 왠지 모를 자신감도 생겼다. 소중한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책의 내용과 내가 느낀 점을 적기 시작했다. 기록은 책 위에 쓴 메모이기도 했고 일기장이나 블로그 글이 되기도 했다. 모인 글을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함도 생겼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 쓰거나 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는데 이 글들은 나만의 비밀 창고였고 스스로 하는 인정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내가 보였다. 내가 규정한 많은 것들에 의문이 생겼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인지, 안전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부모의 관점에서 가르침 받은 세상에 여전히 머물며,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후, 내 생각과 반대되거나 소수의 의견을 담은 책들도 접하기 시작했다. 낯설고 외면했던 글들은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읽은 글들에 대해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 이 글은 2023년 성북구 평생학습 동아리 지원사업을 받은 '엄마의 글쓰기' 모임에 저자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해당 글을 오디오 북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2316/clip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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