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첫걸음을 걸었다.
바래져 가는 기억 속에 잊지 말아야 하는 순간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아이를 낳는 날부터 3일 간 나는 '헌신'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라고. 아내는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싶기도 했겠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단어의 의미를 오롯하게 익혔던 시기였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통상 3일 정도 입원한다. 이후엔 자택이나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이 ‘3일’이 앞서 말한 3일이다. ‘당연히 출산한 아내에게 있는 노력 다해 헌신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남편으로서 맡은 책임과 의무는 별개로 개인적인 배움이 있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지혜가 된다고 하던데. 나는 아주 조금 지혜로워진 건가? 새삼 뿌듯하다.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푸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나, 단기적인 봉사활동에서 그리고 본연의 업무 중 의도를 담아 한 발짝 더 나아갈 때. 특별하다고 하기엔 특별하진 않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때의 행위를 이토록 되새기는 걸까? 나는 어떤 형태의 헌신을 했던 걸까? 또 한편으론 출산의 주체자가 아닌 보조자로서의 경험만으로도 '헌신'을 논하는데 '모성애'는 어떤 느낌일까.
임신 40주차 저녁이었다. 마지막 정기 검진을 무탈히 다녀오는 차 안에서 진통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평소 웹서핑으로 다진 출산 과정과 팁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는 실전에 강한 타입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시작된 진통에 놀라지 않고 사전에 설치한 진통주기 점검 앱을 바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필요했던 중요한 팁은 바로 '밥 먹기'였다. 다행히 병원이 멀지 않아서 우리는 집으로 마저 향했다. 긴 시간 이어질 진통에 대비하여 꼭 밥을 먹어야 한다고들 한다. 밥은 먹어야겠으나 마음은 붕 떠 있었기에 우리는 라면을 먹었다. 밥까지 말아서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든든하게 먹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초산 부부가 흔히 하는 큰 실수 중 하나를 면했다. 급한 마음에 얼른 병원에 가도 마음처럼 바로 입원시켜주지 않는다. 되려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자칫 빈속으로 바로 입원하게 돼도 문제다. 오랫동안 진행될 출산 과정 중에 체력이 바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분 주기로 진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병원으로 출발하여 입원했다.
저녁 8시쯤 입원하여 다음날 새벽 4시 38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8시쯤 아내가 먼저 병실로 입원했다. 통제된 병실 앞에는 나와 같은 남편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같은 행동 하나를 한다. 바로 양가 부모님들에게 해당 사실을 전하는 전화를 하는 것. 아마 이게 '아빠'가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산모가 여러 검사와 환복을 마친 후에야 남편들이 입장하게 된다. 약 2시간쯤 기다렸다.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내와 아이가 겪을 수도 있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조우하게 됐을 때’ 그리고 ‘아기 손수건 세탁’ 정도 기억에 남는다. 아기 손수건은 3번은 연속적으로 세탁하여 자연건조 후에 건조기로 세탁해야 좋다(먼지 때문이라고 한다). 장시간이 소요되는 손수건 세탁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한 최적의 밀린 세탁물 선정 과정 등을 고민했었다.
아내가 누워있는 병실에 들어갔다. 누워있던 침대에서 출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고 한다. 산모 침대 정면엔 블루투스 스피커 겸 전자시계가 있었다. 스피커가 있는 게 참 좋았는데, 아내의 요청에 따라 여러 노래들을 틀어줄 수 있었다. 또 아내가 좋아할 만한 책을 휴대폰으로 찾아 읽어주기도 했다. 세상이 참 편리함에 감사했다. 그렇게 영상도 찍고, 음악도 듣고 하며 아내의 절정으로 향하는 진통을 함께 견뎌냈다. 동시에 주변 병실에서 울려 퍼지는 새 생명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산모가 입원하면 꽤 오랜 시간 물조차 마실 수 없다. 한창 진통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쯤 수술 여부에 따라 물을 마실 수 있게 된다. 인터넷 서핑 중 맞닥뜨린 몇 안되는 진정한 팁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바로 ‘꺾이는 빨대’.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나 얻어왔다. 상당히 요긴하게 썼다. 꺾인 빨대로 고개만 겨우 가누는 아내에게 물을 먹이는 이 장면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영상 매체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날것’의 목소리. 하나의 생명이 처음으로 내뱉는 소리. 정말 그 목소리란 경이롭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처음를 축하하고, 기념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생명’이 내뱉는 첫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나를 잇는 생명이 내뱉는 첫 행동을 맞이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4시 28분에 우리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탯줄을 잘랐다. 아이는 엄마 품에도 잠깐 안겼다. 그 사이에 나는 고생한 산모 대신 조용히 몇 방울 정도 흘렸다. 어린 시절엔 툭하면 울던 스스로가 별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렵지 않게 눈물을 흘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고생한 산모 대신 아빠가 운다는 의사 선생님의 짧은 농담과 함께 고조되었던 분만 현장이 ‘전(轉)’에서 ‘결(結)’으로 넘어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보호자로서 할 입원수속과 그 외 잡다한 일을 처리했다. 3일간 지낼 개인 입원실은 침대와 화장실 그리고 작은 소파와 냉장고 정도로 꽉 찼다. 새벽에 간호사가 개인실과 단체실 중 선택을 요구할 당시에 내 뒤에 있던 다른 예비 아빠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금 쿨하고 선뜻 개인실을 선택한 것치고는 방이 조금 간소했다. 아마 드라마에서 본 재벌들 VIP병실 정도를 혼자 상상하며 선택했던 것 같다. 그래도 선택의 순간만은 재벌이었다.
아내는 3일간 거동이 어려웠다. 출산 도중 척추에 놓았던 무통 주사가 흔들려 하반신에 일시적인 문제가 생겼었다. 하체가 잘 움직이지 않아서 3일간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이후에는 문제없이 회복해서 다행이었다. 아내와 입원할 병실에 갈 때쯤엔 조식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말 그대로 ‘무기력’한 아내에게 아침을 먹여줬다. 화장실조차도 편히 못 가는 아내를 도와주다 보니 3일이라는 시간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리고 퇴원 날에 병원에서 준 출생증명서에는 '김말자(가명)의 아기'라고 적혀있었다. '김말자의 아기'가 우리 아이의 첫 이름이었다. 참으로 적절해 보였다.
이래저래 이야기들을 적어봤음에도 내가 어떻게 '헌신'했는지 표현하기가 어렵다. 아무도 공감 못할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헌신의 경험이 너무나 미약하여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저리주저리 당시의 상황들이 적으며 기분이 묘하다. 비몽사몽하며 아내를 챙기던 순간도 생각난다. 한 순간의 귀찮음이나 나태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평소에 확신과 함께 어떠한 상황을 정해놓지 않는 나로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기억이 바래져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적어놓기라도 하려고 한다. 나도 살면서 확신에 찬 몇몇 순간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아내와 아이를 향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