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은 이런 식으로도 담기는구나 - 놀아주기
정말 쉽지 않다. 아이와 논다는 것은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부모 이전에 하나의 사람으로서 ‘유치’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해야 하는 점이 참 어렵다. 우리의 의도는 상대방의 기분을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순간이 너에게 온전히 즐거운 순간이길 바라는 이 '특별한 유치함'. 큰 추억이 될 일이든, 작은 하루의 일과든 오직 아이만을 위한 놀이를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아이가 돌(12개월)이 지난 이후에는 자주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아니, 읽음 당한다고 함이 맞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느낀다. 독서 방향이 바뀐다고. 신생아 때는 초점책, 색감책하며 아이에게 낯선 패턴들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다 아이가 기대어 앉을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오면 부모님들의 간소한 구연동화가 시작된다. 혹은 이미 많이 노련해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구연동화를 본 적은 없으나 내가 하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살면서 과장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작더라도 사회적 체면을 신경 쓰며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의 사회적 체면은 얼마나 아이의 이목을 잘 끌면서 책을 읽어주는지에 따라 상승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밖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가 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아이와 나의 독서 내용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올 때가 있다. 묘하게 작고 상당한 뿌듯함을 느낀다. 당연히 종종 아이를 뺏길 때도 많다.
이 시기의 아이는 책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시로 바뀌는 부모의 목소리나 그림 또는 색감들에 집중한다. 나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책에 적혀있는 글자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글 작가님들에게 죄송하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글 내용을 읽으려다 보면 정작 아이와 그림에 대한 집중이 종종 깨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로 아이와 같이 그림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적당한 문장들과 주요 전개 내용을 엮어서 아이에게 읽어준다. 아이는 대부분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최근에 들어선 손가락을 하나 펴며 ‘한 번 더’를 몸소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1처럼 작은 숫자를 더하여도 10, 20, 30도 될 수 있구나 싶다. 그렇게 아이의 요청에 따라 첫 장을 다시 편다. 그러고는 같은 책의 다른 스토리가 시작된다. 또는 다른 효과음 혹은 등장인물의 달라진 행동 순서들이. 그렇게 같은 책을 십여 차례에 걸쳐 읽게 되면 다른 책도 읽어주길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나를 위해서. 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바퀴 그림책에 빠졌다. 내용은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바퀴들이 첫 장부터 끝장까지 나온다. 책이 뜯기고, 찢어지고, 구멍이 나도 아이는 정말 좋아했다. 사실 그 책은 내가 아내에게 책이 별로라며 비판했던 거의 첫 책이다. 아마 나만의 애매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정말 신기하게도 그 책을 너무나 많이 좋아했다. 초반엔 읽어주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만져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찔러보고 찢어본다. 찢어보는 지경에 이르면 어느 부모님이든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이러면 안 돼요. 책은 읽는 거예요'.
아이 입장에서 책은 정말 읽는 걸까? 본 적도 없는 요란하고 현란한 모양과 색채들이 매 장마다 등장한다. 마치 '나를 안 만지고 배길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이. 아이는 그저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검지로 그림을 만져봤을 것이고, ‘푹’하고 종이가 못 견디고 구멍이 나거나 ‘쭈욱’ 찢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부모님들은 손때가 잔뜩 묻은 책을 테이프로 응급조치한다. 구조작업을 여러 번 마친 책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들긴 한다. 애정은 이런 식으로도 담기는구나.
아이가 혼자 걸어 다니게 되면서 행동반경이 더 늘어났다. 계단이 있는 건물을 방문하게 되면 아이는 계단 오르락 내리락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 많지만 않으면 참 좋은 놀이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이나 큰 건물일수록 좋은 놀이터가 된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쉽게 지치지 않고 그래서 시간 또한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또 ‘픽’ 잘 잠든다. 우리는 그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끝나고는 아이를 들어 손을 잘 씻겨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대부분 전시물보다는 박물관 바닥에 있는 안내판 또는 그림자 혹은 복도에 놓인 대형 식물들을 관람한다. 이렇게 여기저기 온갖 것을 만지고 바라보다 보면, 때 지난 점심시간에 챙겨 온 밥도 잘 먹는다. 확실히 시장이 반찬이다. 집에서와는 비교도 안되게 꿀떡꿀떡 잘 먹는다. 아이들이 밥만 잘 먹어줘도 육아는 반이 쉬워지는 듯하다.
슬슬 칭얼거리는 아이와 배고픈 성인 하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육아용품 중 최고는 자가용임이 틀림없다. 아이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세상에서 제일 안락하게 잠이 든다. 그리고 나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한다. 너무 좋다. 오늘 다녀온 박물관이 무슨 박물관이든 상관없다. 잠든 아이가 고맙고, 자동차에 핸드폰이 연결된다는 게 고맙다. 우리 집 자동차는 아마 나를 위한 '육아'용품인 듯하다.
때때로 종일 집에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답답할까 봐 동네 산책을 가자고 한다. 아이는 바로 좋다고 할 때도 있지만 때론 나가기 싫다고 의사표시를 한다. 말은 잘 못해도 이럴 땐 참 확실하다. 어쩌면 내가 나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럴 땐 아마도 아이는 집 안에서 자신만의 놀이에 빠져 들었을 때다. 그리고 아이가 즐겁게 행하는데 내가 거기에 스며들지 못한 것이다. 내가 이 '특별한 유치함'에 빠져들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아이가 깡깡이(토끼인형)에게 맘마를 해주는 것에 중독되다시피했다. 눈을 뜨면 ‘깡깡’을 말하면서 주방요리 장난감으로 간다. 요즘은 집에서 주로 내가 요리를 하고 있다. 넓은 주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리하는 것에 나름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깡깡이 맘마놀이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어렵다기보다는 쉽지 않다. 그러나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는 나와는 다르다. 며칠째인지 모르는 그 놀이를 아이가 엄마랑 함께라면 더 집중해서 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엄마 역할의 중요성이 새삼 잘 와닿는다. 어쭙잖게 요리를 좀 즐긴다고 해서 끼어들 수 없는 그 분야가 있다. 그럼에도 더 노력해 봐야지.
5살 때가 내 기억의 시작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랑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있긴 하다. 신문을 엎드려서 읽고 계신 어머니. 그리고 당신의 등 위에서 뒹굴거리도, 놀아달라며 칭얼대기도 했던 기억이다. 억울하시겠다, 우리 부모님. 그럼에도 나는 저 기억이 참 좋다. 드라마에서나 느낄 법한 따스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이가 주로 누워만 있거나 겨우 앉아 있는 시기에 주 양육자였다. 그러다 아이가 10개월쯤에 내가 이어서 육아 바통을 받았다. 이 시기는 아내와 비교하면 아이와 놀아주기에 아주 훨씬 수월했다. 물론 육체적 피로는 별개로.
내가 주 양육자가 되고선 계절 또한 여름이었다. 아이와 화창한 날에는 근처 공원과 식물원에 자주 갔었다. 아이도 넓디넓은 풀밭에서 마음껏 걸을 수 있었고, 나 또한 바깥바람을 쐤다. 거기에 활력소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름다움을 많이 충전할 수 있었다. 대부분 누워있거나 안겨있던 시기의 아이를 돌봤던 아내는 어땠을까? 온 집안의 커튼을 다 걷고 자연 채광을 최대한 올려도 충족되지 않는 갈증에 목말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다 큰 성인 하루아침에 삶의 형태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열 달을 품고 있었다고 다를까. 마음을 몸이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삶은 토끼와 거북이 우화와 비슷할 때가 많다. 어느 순간 마음은 몸을 기다려 줄 것이다. 앞서나간 마음이 노곤노곤 잠이 들었을 때 우리의 쳐졌던 몸이 부지런히 따라와 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과는 다르게 거북이가 이기는 시나리오보다는 무승부가 진정한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오늘은 퇴근한 아내에게 은근슬쩍 수고했다고 말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