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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과 쌤 Feb 18. 2020

생각나는 환자에 대해 말해주렴

내가 진료한 아이들에 대해서 기록한다는 것

의사면허 자격을 갖게 된 직후 대학병원에서 1년 간 수련의로 있을 때 제주도의 한 병원에 파견을 간 적이 있었다. 수련의는 보통 인턴이라고 하는데, 추후 내과라든지, 소아청소년과, 외과 등 전문 과목 수련을 받기 전에 1년간 여러 과에서 일을 하면서 업무를 익히게 된다. 소속된 과에 따라서 업무가 조금 다른데 보통 중요한 일은 해당과의 전공의가 담당하고 상처 소독 같은 간단한 술기와 일차적인 간단한 진료를 맡는다. 




제주도의 병원에서는 응급의학과 진료를 맡게 되었다. 나와 수련의 동기 친구 한 명이 더 있어 우리는 12시간 교대근무를 했다. 우리 외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생님 3분이 따로 있었다. 응급환자가 드물거나 외래에 다른 과 선생님들이 계신 낮 시간대에는 인턴인 우리가 응급실에 대기했고 외래가 문을 닫는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는 옆에서 일을 도왔다.


응급의학과 과장님 세 분은 모두 좀 다른 성격을 가졌다. 그중에 대장 격인 선생님은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수련을 마치고 고향인 제주에 내려오신 분이었는데, 나와 친구에게 끊임없이 의학적인 질문을 하셨다. 


- 이 환자의 경우 왜 이 검사를 했지? 이 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공부해 봐.

- 아이들의 경우 X-ray에서 골절을 알 수 있는 특징적인 소견이 있어. 찾아서 공부해 봐.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나와 친구는 선생님의 질문에 꽤나 성실히 준비해서 알아보는 타입이었고, 선생님도 꽤나 만족해하신 듯했다. 솔직히 내 친구가 워낙 뛰어났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 외 두 분의 선생님 중 젊은 분은 우리와 많이 친했다.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장난도 많이 하셨고, 의학적인 질문을 해서 우리가 따로 공부를 해오게 하기보다는 그냥 알려주시길 좋아하셨다. 다른 한 분은 말수가 적었고, 우리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즈니스 관계의 느낌. 이렇게  응급의학과 선생님 세 분이 각기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면  '파이터 기질'이었다. 응급실에 온갖 거친 사람과 무례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진료를 위해서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이게 많은 응급의학과 선생님들의 성격임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좀 당황했다. 당연히 셋 중에 대장 격인 선생님이 제일 무서웠다. 


한 달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열두 시간 근무를 하고 나서 여섯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식사를 하면 다섯 시간 후에 다시 근무를 서야 했으니까, 그 시간에 제주도를 여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주도의 다른 병원에 파견 나온 친구들을 잠시 만나고 들어오거나 혼자서 책을 보면 금방이었다. 타고난 환타 (환자를 타는 의사. 업무 시간에 중환이 몰려오는 의사를 말한다.) 였던 나의 근무시간은 폭풍과 같은 업무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경험을 뒤로하고 나는 수련의로 있던 대학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에 지원하여 전공의가 되었다. 정신없이 바쁜 전공의 2년 차 여름에 짧은 4일간의 휴가기간이 주어졌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었던 나는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급하게 구했다. 다른 친구들과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내가 먼저 제주도에 도착했고, 시간이 비었기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나는 내가 2년 전에 잠시 있었던 그 병원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응급의학과 과장님 세 분 중에 어떤 선생님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인사를 한 번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항에서 멀지 않으니 시간 상으로도 적절했고. 약간의 설렘을 안고 병원의 응급실에 들어갔다. 낮이라서 한가했고, 환자도 없었다. 사복 차림의 사람이 들어오니까 간호사 선생님이 응급실 내원객인 줄 알고 누구시냐고 물어보았다.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친했던 분들이 그 시간에 있지 않아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2년 전에 여기서 잠깐 인턴을 했던 김OO라고 밝히고 과장님 계시냐고,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다. 대장 격인 선생님이 계셨다. 내가 가장 인사드리고 싶었던 분.


선생님은 내 얼굴을 기억하셨다. 앉아서 근황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었다고 하자 원래 원하는 과에 잘 들어간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업무는 어떤지 물어보시기에 1년 차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매번 혼나면서 일했지만, 2년 차가 되어서는 그래도 좀 어느 정도 역할을 해서 소아심장과와 소아혈액종양학과 등 대학병원에서만 볼 수 있는 중환도 진료하는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 오, 그래? 그럼 생각나는 흥미로운 환자 케이스에 대해서 좀 말해주렴.

- ......


순간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히 진단명만 대면서 이런 환자를 보았노라고 얼버무렸다. 선생님의 눈빛은 호기심에서 실망으로 변한 것 같았다. 


1년 반 동안 수많은 아이들의 처방전과 의무기록에 나의 이름이 적혔다. 하지만 나는 그중 단 한 명도 자신 있게 경과와 진단, 치료에 대해 줄줄이 설명할 수 있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환자의 전체 경과를 조망하는 것이 교수님의 역할이라고만 생각하고 루틴에 따라서 그때그때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전공의였을 뿐이고, 이전의 환자 진료 경험에 대해서 복기를 하지 않는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외과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했다. 다른 의사들의 존경을 받은 선생님은 매일 밤 자신이 집도한 환자의 경과와 수술기록을 따로 자신의 노트에 복기한다고 하시면서 환자 경험이 자신의 재산이라고 말하셨다.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밤에 환자에 대해서 따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퇴근 후의 여유 시간을 포기하고 환자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의미고, 이는 정말 쉽지 않은 습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끄럽게도 그 이후 전공의 수련 기간 동안에 나는 나만의 환자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조금은 진료 과정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되새김질하는 습관은 생겼지만. 이제 와서 문득 그리운 아이들과 보호자가 있어 자세히 생각해보려고 해도 어렴풋이 그때의 감정만 느껴질 뿐, 자세한 의학적 배경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지 않아서 기록을 남기면서 공부할만한 증례가 흔하지 않기에 예전의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뒤늦게 절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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