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 지표 (Leading Indicator)
<2010년 3월 13일>
“한국에 돌아온 이후, 특히 DSM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로 정말 너무 바쁘다... 새로이 맡은 일에서 벌어지는 온갖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과 그 과정에서 얻는 교훈들... 수많은 사건, 사고와 생각들이 정신 차릴 사이없이 지나가고 있다.“
글로벌 마케팅 업무를 한 지 3년이 될 무렵, 회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물론 제안이라기보다는 귀국을 준비하라는 신호에 가까웠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취업비자(H-1B)로 일하고 있었기에 무한정 미국에 있을 수 없었고, 한국 지사로 이동할 때가 온 셈이었다.
좀 아쉽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미국에서 업무 경험을 쌓아보고 싶었던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언젠가는 한국에서 경력을 이어가야 할 터였다.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경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도 마음을 정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우선 영업지점장(DSM, District Sales Manager)으로 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것은 입사 때부터 예정된 코스이기도 했다. 나는 ‘LLDP(Lilly Leadership Development Program)’라는 경로로 입사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리더 양성을 목적으로 일선 영업사원, 마케팅, 영업관리자로서의 경험을 필수적으로 거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 정신과 의약품 사업부의 한 지점을 맡게 되었다. 아산병원, 삼성의료원, 강남세브란스 등 주요 병원들이 위치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부담감이 컸지만 다행히 우리 지점에는 베테랑 영업사원 아홉 명이 있었고, 이들은 제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담당 지역의 의사, 간호사, 병원 관계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지점장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지점 내 영업사원들을 코칭하고 그들이 성과를 잘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3-4일은 영업사원과 동행하며 그들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주어야 했다. 한국에서의 영업환경에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이미 경험 많은 영업사원들을 지도한다는 것이 때때로 쉽지 않은 과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점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체력적 부담이었다. 9명의 영업사원과 각기 한 달에 두 번씩만 함께 일한다고 해도 거의 매일 현장에서 일해야 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제품설명회와 같은 행사도 많았고, 고객과의 저녁 약속 또한 잦았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약속이 두 개씩 겹치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저녁 일정을 마치고 나서 지친 몸을 이끌고 밤늦게 퇴근해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낮동안 하지 못했던 각종 서류 작업이나 보고서 작성 등의 업무는 그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정이 넘어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이렇게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하기도 했다.
몸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때 당시 아이들이 한창 아빠랑 놀고 싶어 하던 시기였지만, 정작 나는 아이들 깨어있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날이 많았다. 그 무렵에는 내가 찍어준 아이들 사진도 별로 없고, 아이들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도 제대로 쓴 날이 별로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매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한국에 온 이후 가족과의 시간이 턱없이 줄어든 상황이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영업에는 "실적"이라는 말이 피할 수 없는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닌다. 실적은 영업하는 이들의 숙명과도 같고, 그 압박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로 크다. 미국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도 그랬고, 한국에서 영업지점장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나중에 지사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영업사원이건, 지점장이건 누구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윗선으로부터 소위 ‘쪼임’을 당한다.
사실 실적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후행 지표(lagging indicator)'라고 볼 수 있다. 엎질러진 물이고 딱히 어찌할 수 없는 결과일 뿐인 것이다. 물론 매출액이나 시장 점유율 같은 후행 지표들은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마치 이미 끝나버린 시험 점수를 두고서 아이를 윽박질러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미 나온 결과만 놓고서 화내고 질책하는 것은 부질없다. 때로는 영업회의에서 실적 때문에 질책받을 때 속으로 이런 생각도 들곤 했다. ‘누군들 못하고 싶어서 못했겠습니까.‘
가장 나쁜 것은 ‘다음에는 무조건 더 잘하라'고 하는 것이다. 가끔 그런 질책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한 리더를 볼 때면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TV의 경쟁 리얼리티 쇼 같은 곳에서도 참가자들이 '다음에는 무조건 더 잘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세상에 ‘무조건’이라는 전략은 없다.
결과를 향상하고 싶다면 싶다면 후행 지표(lagging indicator)가 아닌 선행 지표(leading indicator)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선행 지표(leading indicator)’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아직 시도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활동들을 지표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업에서의 선행 지표란 영업사원이 얼마나 정기적으로 고객을 방문하는지, 파악한 고객의 니즈와 회사가 제공하는 솔루션을 얼마나 자주 연결 짓는지 같은 것들이 될 수 있다. 성과를 높이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행지표가 무엇인지를 잘 짚어내고, 여기에 모든 자원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영업지점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챙겼던 것도 팀원들의 실적이 아닌, 선행지표 관리였다.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이 굳어진 실적만 놓고서 서로 스트레스를 주는 대신, 머리를 맞대고 그동안 어떤 시도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했는지, 혹은 어떤 활동들이 미진했는지 등을 함께 확인하며 아직 남아있는 시간 동안 해 볼 수 있는 일들에 대해 합의하고 그 분야에 노력을 집중하도록 돕는 것이 성과를 향상시키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 선행 지표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점장으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전쟁터처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일선 현장에서 고객들을 만나고 팀을 이끌며 체득한 경험들은 그동안 머릿속에만 있던 '이론'을 단단한 '현실'로 바꿔주었다. 제약산업의 '시작점'이 라 할 수 있는 R&D 분야에서 경력의 첫걸음을 뗐던 내가, 제약산업의 '종착점'이 어떠한지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에서건 삶에서건 지나간 ‘결과’에 매몰되어 있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함을 배운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세상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매일의 작은 선택과 행동들이 모여 큰 결과로 이어지는 법이다.
더불어서,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가족과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절실히 깨달았다. 아이들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었던 나날을 보내며 가족이라는 존재 그리고 나의 건강이라는 자산이 그 어떤 실적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측정 가능하다. 문제는 무엇을 지표로 삼을 것인가다. 자신의 삶에서의 성공을 가늠할 ‘후행 지표’는 무엇이고, 이를 위한 ‘선행 지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각자 한 번씩 멈춰 생각해 볼 일이다.
(2024년 11월)
Cover Image: Photo by Majid Rangra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