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참조가격제 (IRP)
<2010년 11월 9일>
태진님. 이번 행사를 이끌고 자료를 준비하는 등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미 님의 리더십이 큰 차이를 만들고 있으며, 특히 긴박감을 가지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J
Taejin nim, Thanks for this, taking the lead, developing the slides etc. Your leadership is already making a difference and I appreciate your sense of urgency.
Best regards,
J*****
2010년 10월, 새로운 보직으로 발령이 났다. 대외협력업무 부서장 자리였다. 여러모로 의외였다. 우선 시기적으로 영업지점장 역할을 맡은 지 1년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빠른 이동이라 놀랐다. 하지만 더 의외였던 것은 맡게 된 역할이었다. 본사에서의 경험을 감안하면, 언젠가 임원이 되더라도 마케팅이나 사업본부의 임원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외협력부라니? 생소하기도 하고 경험도 없었던 터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러운 발령은 그 무렵 발표된 정부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의약품 시장형 실거래가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공표했는데, 이는 제약업계 전반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당시 한국 지사장이었던 J는 기존 조직만으로는 이 상황을 대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새로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부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역할을 나에게 맡겼다.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자마자 전국 각지의 병원, 요양기관 및 의약품 도매상들로부터 의약품의 공급가격을 할인해 달라는 요구가 제약회사로 빗발쳤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초유의 상황이었다.
병원들이 의약품의 가격을 깎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건강보험공단이 책정해 둔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의약품을 구매하면, 그 차액의 70%를 병원 수익으로 돌려주겠다는 정부 방침 때문이었다. 병원 입장에서는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기회가 생긴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특히 구매력이 큰 대형 병원일수록 이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도입한 데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다. 의료보험 재정에서 의약품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국민건강보험을 운영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재정 효율화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거래가를 반영해서 의약품의 고시가격도 매년 낮추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제약회사, 특히나 복제약이 아닌 신약을 전 세계에 판매하는 글로벌 회사 입장에서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K-팝과 K-드라마뿐만 아니라 K-약가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정부는 신약 가격을 낮게 책정하기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다른 어느 나라들보다 의약품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외국 보건당국들은 한국의 낮은 약가를 면밀히 관찰하고, 자국에도 한국만큼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라는 압력을 제약회사에 넣는다. 이를 ‘International Reference Pricing (IRP, 국제참조가격제)’ 라 한다.
문제는 한국이 글로벌 약가 구조에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반면, 정작 시장 규모 자체는 세계시장의 1~2%에 불과할 만큼 작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시장을 가진 국가들이 한국에서의 낮은 가격을 참조해서 약가를 깎겠다고 하면,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차라리 한국에는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로 신약을 출시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를 업계에서는 “코리아 패싱 (Korea Passing)”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개발된 신약 중에서 한국에도 도입된 약의 비율은 고작 35%에 불과하다. 전 세계 환자들이 누리는 첨단 의약품 세 개 중에 두 개는 한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정부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치가 필요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은 글로벌 본사에 해당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한국의 가격 정책에 대해 예민한 본사 담당자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가격인하 기제가 생겼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으로는 조직 정비가 필요했다. 회사 내에 Key Account Management(KAM) 팀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로 하고, 많은 영업사원들 중에서 소수의 정예 멤버들을 신중하게 선발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양한 교육을 제공했고, 전국을 나눠 담당하도록 구역을 배정했다. 또 이들이 수행할 역할의 크기와 중요도를 감안해서 그에 걸맞은 관리자급 직위를 부여했다.
끝으로, 팀과 전략을 준비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일개 팀의 힘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사장의 허락을 받아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를 열고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회사의 대응 방향, 새로 만든 팀의 역할 등에 대해 공유했다. 전사적인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일기 내용은, 이 설명회 직후에 지사장 J로부터 받았던 메일을 옮겨 적어 놓은 것이다.
매일 아침 KAM팀과 나는 출입문에 “War Room”이라고 써 붙인 사무실에 모여 회의로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는 전날까지 취합된 각 병원의 입찰상황 등을 함께 검토하고, 영업팀, 마케팅팀, 도매관리팀의 직원들과도 그 현황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날그날 각 병원별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한 다음 비로소 팀원들을 현장으로 내보냈다. 마치 군사작전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부 대형 병원이나 대형 도매상들은 가격을 과도하게 깎으려고 하면서, 때로는 은근한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팀원들은 회사의 녹록지 않은 정책과 고객들의 험악한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참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한 번은 회의를 마치고 현장으로 떠나는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 각자의 주머니에 10억 원씩 넣어드렸다고 생각하세요.“
손실이 생겨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주눅 들지 말고 자신 있게 일하라는 의미였다. 훗날 한 직원이 그때의 이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신설된 KAM팀은 회사가 새로운 제도 아래에서도 모든 주요 병원에 약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잘 해냈다. 1년 후, 회사는 최고의 성과를 달성했고 본사로부터도 많은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이때의 경험은 내가 조직과 인재, 성과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도전과 성장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교훈은 ‘탁월한 팀을 만드는 법’과 ‘믿음의 힘’에 대한 것이었다. 탁월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훈련과 권한을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지사장 J가 나에게 신뢰를 보내줬던 것처럼, 나도 우리 팀원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사람에 대한 이런 믿음은 회사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믿는 것을 넘어 그들의 가능성을 보고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패의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움직이는 연료이자,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2024년 11월)
Cover Image: @karishea,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