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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사과

생물학적 제제 (Biological Drugs)

by 함태진 Jan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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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4일>

인슐린 탄생 90주년임과 동시에 WHO가 지정한 World Diabetes Day. 이 날을 맞아 초보 communications specialist인 L님이 야심 차게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지사장) J가 갑자기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L님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좀 깨질 각오 합시다.” (L님의 매니저인) M님에게 한마디 건네고 함께 사장실로 갔다.


매년 11월 14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세계 당뇨병의 날이다. 특히 2011년은 인슐린이 개발된 지 90주년 되는 해였는데, 인슐린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제약회사가 바로 일라이릴리(Eli Lilly)이기 때문에 회사의 대외협력업무를 총괄하는 임원인 나에게 이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모든 실무적인 진행은 신임 홍보 담당자 L이 맡았다. 첫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그녀의 열정은 대단했다. 케이크부터 조명, 그리고 사진 촬영까지, 세부적인 사항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행사 당일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미소를 띠고 대형 조형물 앞에 모였고, 당뇨병의 날을 상징하는 푸른 불빛이 배경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모든 게 너무 순조롭다 싶을 때 문제가 생겼다. 사진 기사였다. 처음에 그는 자연스럽게 참석자들의 미소를 이끌어내며 셔터를 연신 눌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고깔모자를 꺼내 들며 외쳤다. “자, 이제는 이거 한 번 써보고 찍어봅시다!”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예정된 콘셉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어색하게나마 그의 요구에 따랐다.


하지만 고깔모자로 끝나지 않았다. 사진 기사는 이번에는 행사가 진행되던 장소를 벗어나 사람들을 다른 장소로 이끌고 갔다. 그리고 거기서 더 어색한 포즈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사장 J가 폭발했다. 그는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격노한 것이다. 순간 행사장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물을 참지 못한 L, 당황한 홍보팀장 M,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다른 부서 직원들... 나는 팀원들을 다독이며 행사를 서둘러 마무리 짓도록 했다. 그리고 잠시 후 J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향했다.


J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 사진 기사가 이전에도 무례하게 굴었던 일을 언급하며, 나와 우리 팀이 그의 행동을 더 적극적으로 통제했어야 한다고 질책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나의 부족했던 점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다음날 오후, J는 다시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날과는 다소 다른 표정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던 그는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며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팀원들은 지금 어떠냐며 미안한 마음을 전달해 달라고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사과에,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항상 강한 카리스마를 잃지 않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내가 분명 부족했던 점이 있었던 만큼, 딱히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No worries. It was a valuable learning opportunity for me and my team as well. (괜찮습니다. 어제는 저와 저희 팀에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인슐린: 생물학적 제제의 시작

20세기 초, 당뇨병은 그야말로 죽음의 병이었다. 췌장이 충분한 인슐린을 생산하지 못해 발생하는 이 병은 치료법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1921년, 캐나다의 프레더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가 개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해 환자에게 주사하면서 역사가 바뀌었다. 이후 1923년, 제약회사 일라이릴리(Eli Lilly)가 최초의 상업용 인슐린을 출시하면서 당뇨병은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동물의 췌장에서 추출한 인슐린은 한계가 많았다. 생산량이 적고, 불순물이 많아 부작용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1982년에 등장한 휴물린(Humulin)이다. 생명공학기업 제넨테크(Genentech)와 릴리의 협업으로 개발된 이 약은 인간 DNA를 재조합한 박테리아를 사용해 순수한 인간 인슐린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휴물린은 생물학적 제제의 탄생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생물학적 제제와 화학 약물: 그 차이점

생물학적 제제(biological drug)는 화학 약물(chemical drug)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화학 약물은 작은 분자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실험실에서 대량 생산된다. 반면 생물학적 제제는 살아있는 세포를 통해 만들어지며, 복잡하고 거대한 분자 구조를 가진다. 예를 들어, 화학 약물인 아스피린을 작은 구슬 크기라고 가정한다면, 류마티스관절염 치료제인 생물학적 제제 아달리무맙(adalimumab)의 크기는 길이 8미터의 트럭 정도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크기와 복잡성 덕분에 생물학적 제제는 우리 몸속의 특정 목표물들을 매우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1980년대부터 생물학적 제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고, 지금은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대략 절반 정도를 생물학적 제제가 차지하고 있다.


생물학적 제제의 진화: 새로운 치료법의 미래

생명공학 지식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의약학의 지평은 끊임없이 획기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암과 희귀 질환 같은 난치병에 맞서기 위해 개발된 새로운 치료법들은, 예전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질병을 공략하고 있다.


항체-약물 접합체 (Antibody-Drug Conjugates, ADCs): 스마트 폭탄

ADCs는 암세포를 겨냥하는 '스마트 폭탄'과 같은데, 다음의 두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 암세포와 같은 목표물을 정확히 찾아내는 ‘유도 시스템’ 역할을 하는 항체

-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폭탄' 역할을 하는 항암제


이 약물이 몸에 들어가면, 항체는 암세포를 찾아 정확히 결합하고, 항암제는 그 암세포 내부에서 방출되어 암을 파괴한다. 이렇게 하면 건강한 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어 기존의 화학요법보다 부작용이 현저하게 적다. 유방암, 혈액암을 비롯한 일부 암 질환에 ADC 약제가 개발되어 쓰이고 있다.


CAR T-세포 치료제: 면역세포의 업그레이드

CAR T-세포 치료제는 환자의 면역세포를 암과 싸우는 '슈퍼 히어로'로 변신시키는 치료법이다. 환자의 혈액에서 면역세포의 한 종류인 T세포를 추출한 뒤, 암세포를 인식하는 특수 수용체(CAR)를 추가로 장착하고, 이렇게 강화된 세포를 다시 환자의 몸에 주입하면, 업그레이드된 T 세포는 암세포를 더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공격하는 방식이다. 특히 혈액암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여왔고, 기존의 다른 치료법이 모두 실패한 환자들을 완치에 이르게 한 사례들도 있다.


RNA 기반 치료제: 유전자 메시지의 컨트롤

RNA 기반 치료제는 우리 몸속 DNA에 저장된 정보에 문제가 있을 때, 마치 이 정보를 전달하는 마이크를 꺼버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질병을 치료한다. 그래서 문제 있는 정보에 따라 잘못된 단백질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차단한다. RNA 기반 치료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siRNA (Small Interfering RNA)'와 'ASO (Antisense Oligonucleotide)' 등이 있다. 이들을 활용하여 일부 희귀 질환들에 대한 치료제가 이미 개발되어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유전질환에 대해 연구개발이 진행 중에 있다.


유전자 편집: DNA의 가위

유전자 편집 기술, 특히 CRISPR 기술은 마치 유전자 서열을 "자르고 붙이는" 가위와도 같이 작동한다. 이 기술을 통해 결함 있는 유전자를 아예 잘라내거나 수정하는 방식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2024년 12월 현재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사용승인된 유전자 편집 치료제는 두 가지밖에 없고 이들은 겸상적혈구병과 베타지중해 빈혈이라는 유전성 혈액질환에 사용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많은 유전자 치료제가 현재 활발하게 연구 중에 있다.


더 많은 가능성의 물결

이 외에도 많은 새로운 생물학적 제제들이 연구개발되고 있고, 이로 인해 과거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질환들—암, 희귀 유전 질환, 신경계 질환 등—이 점차 치료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물론, 제조 공정의 복잡성과 이에 따른 높은 비용 및 잠재적인 부작용 같은 해결해야 할 어려움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이를 활용해 더욱 정밀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빨라지고 있고, 앞으로는 '치료(treat)'를 넘어 질환을 '완치(cure)'하거나 '예방(prevent)'하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Unsplash @imchangUnsplash @imchang


인슐린 9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던 날을 떠올리면, 그날 벌어졌던 작은 해프닝 속에도 나름 교훈이 숨어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리더의 사과'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었다.


리더십은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미안하다'는 형식적인 표현만 단순하게 내뱉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자기 성찰과 진심 어린 변화의 시작, 그리고 이를 통해 팀원들과의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 훌륭한 리더십이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리더십이나 과학의 발전이나, 결국 핵심은 같다. 문제를 마주했을 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며 완벽함을 가장하려 하기보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점이다.


그런 성숙한 리더십이 너무도 아쉽고 보기 힘든 요즘이다.


(2025년 1월)



Cover Image: Unsplash @stevedimatt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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