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경제성 평가 (QALY & ICER)
<2012년 10월 25일>
“OO님, 내가 표현이 서툴러서 얼마나 기쁜지 표현을 미처 다 못한 것 같아서요... 정말 기쁘고 대견하고 고맙습니다. 아주아주 큰 산을 하나 넘었네요. 그간 무거웠던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우리 기쁨을 만끽합시다.”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의자에 몸을 뒤로 기댔다. 컴퓨터 화면엔 막 보낸 메일이 그대로 떠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길지 않은 문장들 속에는 내가 느낀 커다란 감정의 아주 작은 부분만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진심을 담기엔 내 글이 너무 부족하고, 말로는 더 서툴렀다.
내가 맡았던 부서의 공식 명칭은 ‘Corporate Affairs’. 한글로는 ‘대외협력부’라 불렸었다. ‘Corporate Affairs’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부서인지 의미가 모호한 반면, ‘대외협력부’라고 부르면 공산당의 무슨 특수한 조직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묘한 이름만큼이나 하는 일도 생소했다. 우리 부서 내에는 앞선 글들에서 소개한 Key Account Management 팀과 홍보팀 외에도 약가팀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딱딱하게 느껴지는 이 팀이 하는 일은 우리 회사의 약들이 건강보험 적용을 받아서 환자들이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정부와 협상을 벌이는 일이었다. 평범한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세계. 사실, 내가 이 부서를 맡기 전까지는 나 역시도 이 세계에 대해 무지했다.
새로운 약을 시장에 내놓으려면 정부와의 긴 줄다리기가 필요했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이상도 걸리는 일이 허다했다. 많은 날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본사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종종 현실과 괴리가 컸고, 정부의 압박은 또 다른 차원의 무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려움이 큰 만큼 조금씩 성취할 때마다 보람도 컸다. 정말 힘들게 타협점을 찾아내고, 모든 문서에 도장을 찍었을 때의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약가에 대해 거의 문외한에 가까웠던 나였지만, 팀원들 덕분에 하나씩 배워가며 결국 모든 과제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칭찬과 상도 많이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그 길 위에서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이었다. 한고비 한고비 넘을 때마다 힘든 과정을 함께 해낸 팀원들에 대한 고마움도 점점 커져갔다.
약값 결정의 복잡한 세계
한국의 약값 책정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훌륭한 제도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우리의 이 시스템은 모든 국민이 필요할 때 적정한 가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런데 의약품 가격을 책정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정부 입장에서는 좋은 약을 국민이 사용 가능하게 하되, 재정적 부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어려운 균형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약품 경제성평가
의약품의 가격결정 및 보험등재여부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관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다. 이들 기관은 순차적으로 제약사와 직접 협상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의약품의 경제성을 필수적으로 따지게 된다. 새로 건강보험에 등재하려는 약이, 효과 및 가격 측면에서 기존 치료법에 비해서 어떠한지를 분석하여 약물의 ‘비용효과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 QALY와 ICER다.
QALY (Quality Adjusted Life Year, 삶의 질을 고려한 기대수명)
QALY는 우리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를 숫자로 표현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완전히 건강한 상태에서 1년을 더 살 수 있다면 QALY는 "1"이 된다. 반면에 병으로 고생하며 산다면, 삶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QALY가 "0.5"나 "0.3"처럼 낮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새로운 약이 기존의 치료제에 비해서 삶의 질을 0.3에서 0.7로 높여주고 5년을 더 살게 해 준다면, 이 약이 제공하는 QALY의 증가는 (0.7 - 0.3) × 5 = 2가 된다.
ICER (Incremental Cost-Effectiveness Ratio, 증분 비용 효과비)
하지만 QALY를 증가시켜 주는 약이라 하더라도 약값이 너무 비싸다면 사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여기서 ICER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ICER는 약의 추가적인 효과, 즉 QALY 1을 더 얻는 데 드는 추가적인 비용이 얼마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 치료제의 가격이 1년 동안 5백만 원이고, 새로운 약은 1천만 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새로운 약이 QALY를 0.5만큼 증가시킨다면, ICER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ICER = 추가 비용(5백만 원) ÷ QALY 증가(0.5) = 1천만 원
즉, 이 약은 QALY 1을 추가로 얻는 데 1천만 원이 든다는 뜻이다.
현실의 어려움들
정부나 건강보험공단은 이런 계산을 바탕으로 약값이 적절한지, 즉 가성비가 좋은지를 평가한다. "QALY 1의 가치"를 얼마까지 비용효과적이라고 볼 것인지 내부적으로 임계치를 정해두고, ICER가 이 기준보다 낮은 약은 비용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 건강보험에 등재시키는 반면, 반대로 ICER가 이보다 높다면 약값이 비싸서 재정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판단하고 보험적용을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QALY와 ICER는 약의 가치를 판단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면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1. 삶의 질의 객관화: QALY는 약의 효과를 환자의 삶의 질로 환산해서 숫자로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 "삶의 질"이라는 개념이 100% 객관적이기는 힘들다.
2. 비교약제의 부재: ICER를 계산하려면 새로운 약을 다른 약제와 비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얼마나 더 나은가(Incremental)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에 쓸 수 있는 치료제가 아예 없는 중증질환이나 희귀 질환의 경우에는 이런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
3. 도덕적 딜레마: 건강과 생명이 걸린 일을 단순히 숫자로만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것에는 도덕적인 딜레마가 따른다. 예를 들어, 희귀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둔 부모에게는 ICER가 얼마인지보다 "이 약이 우리 아이에게 생명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약값 책정의 과정은 복잡하고도 치열하다. 그러나 그 과정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 약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가치를 사회가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약값 책정의 철학적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협상은 늘 커다란 간극을 갖고서 시작되었다. 본사가 제시한 가격과 정부가 요구하는 가격 사이의 차이는 종종 너무 커서 교착 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본사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과 “정부 입장을 수용하지 않으면 협상이 무산된다”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매번 고심하며 타협점을 찾으려 애썼다.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쩔쩔매며 구차하게 빌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전을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단순했다. 협상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이기겠다는 태도로는 결코 해결책에 다다를 수 없다. 이상적으로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의 요구를 맞출 수 있는 win-win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불편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하다. 완벽한 해결책이란 잘 없고, 기껏해야 양쪽 모두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만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의’가 전부인 적도 많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매일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나의 기준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끝없는 협상을 한다. 그럴 때 완벽함을 고집하기보다는 최선의 타협을 향해 작지만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협상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용기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다.
p.s. 그나저나 '협상'과 '타협'은 상대방이 이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겠지요.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2025년 1월)
Cover Photo: unsplash.com/@yannalleg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