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병원 vs 사립병원
<2013년 11월 22일>
“낯선 나라에서 first-time GM으로 일한다는 것. 마치 초보 운전자가 낯선 나라에서 중고차를 사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운전면허는 땄지만 막상 직접 운전대 잡고 도로로 나가보는 것은 처음인 초보운전자… 숙련된 운전자라면 무의식적으로 해낼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을 해가며 해야 하니 머리가 복잡하고 몸은 제때 안 따라준다. 지금 나는 초보운전 중이다. 다 괜찮아질 거야.”
한국에서 임원으로 일한 지 3년 반 정도 되었을 무렵, 외부 이동 중에 국제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시아지역본부의 총괄대표였다.
"Taejin nim, I have an offer to make to you.
태진님,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요"
그는 나를 동남아시아의 3개국 지사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지사장(GM, General Manager)이 되어 일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가슴이 벅찼다. 소식은 순식간에 사내에 퍼졌고, 한국 지사장을 비롯해서 국내외의 수많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내가 맡게 될 나라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3개국이었고, 부임지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였다. 설레었고 의욕이 넘쳤다.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 경력을 돌이켜보면 “처음”이라는 단어는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영업도, 글로벌마케팅도, 지점장도, 대외협력업무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결국은 배워가며 잘 해내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지사의 성과는 몇 년째 부진했고, 팀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현지의 부서장들은 ‘무능하다’, ‘복지부동이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거기다 한국인 사장이 온다고 하니 직원들은 잔뜩 주눅 들고 긴장해 있었다. 아마 ‘한국인은 어그레시브 하다 (공격적이다)’는 이미지도 한몫했던 것 같다. 실제로 당시 한 일간지에서는 “글로벌기업 해외법인장 '어그레시브 코리안' 전성시대”라는 기사를 실으며 나의 발령사실을 하나의 예로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싶었다. 모든 것을 선입견 없이 보고, 개개인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도움을 주며 함께 성과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1:1 면담을 통해 많은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개별 코칭, 명확한 전략 수립, 지표 기반의 성과 관리 등의 방법들을 동원했다. 변화를 이끌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변화는 즉각적이지 않았다. 6개월 후, 나는 내가 낯선 여행지에서 렌터카로 운전하는 초보운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은 처음 해본다. (사장은 처음이다). 차도 처음 보는 모델이다. (동남아 사람들과 일해보는 것도 처음이다). 교통법규도 익숙지 않다. (의료체계와 제약시장이 돌아가는 방식도 한국과 다르다).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는 각기 고유한 의료 시스템 하에 병원 운영방식이나, 약가 정책, 약품 조달 방식 등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1. 병원 운영 모델
한국
한국의 병원은 국공립 병원과 사립 병원 모두 국민건강보험(NHI) 체계에 따라 운영된다. 또, 의료법상 모든 의료법인은 원칙적으로 비영리이기 때문에 병원이 낸 수익은 병원 운영과 재투자에만 사용되어야 하며 외부 투자자 이익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환자는 국공립병원(예, 서울대병원)에서건 사립병원(예, 삼성의료원)에서건 동일한 치료비와 약값을 지불하며, 병원의 서비스 품질과 약가에 큰 차이가 없다.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의료체계는 ‘3M’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소득을 가진 모든 국민이 가입해야 하는 의무 의료저축제도인 Medisave, 고액의료비를 보장하는 의료보험인 Medishield Life, 그리고 기초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는 국가의 보조금제도인 Medifund이다.
공립 병원은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며, 약품은 표준약품목록(SDL, Standard Drug List)에 따라 가격과 보조금이 결정된다. 환자는 정부 지원을 받는 약제비의 일부를 부담한다. 반면 사립 병원은 환자가 전액 자비로 부담하거나 민간 보험을 통해 비용을 처리한다. 약가와 서비스 수준에서 공공 병원과 큰 차이를 보인다.
말레이시아
공립 병원은 세금으로 운영되며 치료비용이 매우 저렴하다. 하지만 병원은 늘 환자로 북적이고 대기 시간이 무척 길다. Blue Book이라는 약품목록에 등재된 약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신약의 사용도 제한적이다.
사립 병원은 싱가포르와 비슷하게 환자가 전액 비용을 부담하며, 공공 병원에 비해 약물 선택권이 더 넓고 신속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반 국민들은 공립병원을 주로 이용하는 반면, 경제적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주로 사립병원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2. 약가 정책 및 약품 조달 방식
한국
약가 협상은 중앙화된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 회사와 협상해 보험급여 상한선을 정한다. 원내에서 조제되는 의약품의 경우 병원별 실제 납품 가격은 개별 병원 단위로 결정되며, 이는 추후 정기적으로 보험급여 상한가 조정에 반영된다.
환자가 내는 약값은 병원규모(1차, 2차, 3차 병원)에 따라 본인 부담금 비율에 차이는 있지만, 원내 조제 의약품의 환자 부담 약품 가격은 전국 어디든 병원별로 차이가 없고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싱가포르
공공 병원과 민간 병원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약품을 조달하기 때문에,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공립 시장과 사립 시장을 구분해서 각각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공공 병원은 ALPS Pte Ltd가 약품을 입찰 방식으로 조달하며, 가격과 품질을 동시에 고려한다. 한편 민간 병원은 약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며, 약가와 서비스가 자유롭게 결정된다. 제약회사에게는 약가 할인 프로그램과 같은 다양한 마케팅 전략이 허용된다.
말레이시아
공공 병원에서 사용하는 약품은 Pharmaniaga와 같은 정부 연계 회사가 관리하는 입찰 시스템을 통해 조달된다. 공공 시장에서 입찰 시스템이 제약사의 주요 매출 채널로 작용하며, 입찰에서 탈락하면 공공 병원 시장 전체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입찰 성공 여부가 매출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제약 회사의 입찰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민간 병원 시장은 공공 시장과 별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제약 회사로서는 보다 자유로운 마케팅과 영업 전략 수립이 가능하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제약사가 각 국가에서 성공적인 전략을 설계하는 데 필수적이다. 의료 시스템의 구조와 특징에 맞춘 맞춤형 접근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개월의 초보운전 기간을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리더는 단지 코치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조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누군가를 재배치하거나, 조직의 방향성을 새로 설정하거나, 때로는 인사조치를 감행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성원들의 반발, 실망, 불만을 각오해야 했고, 내가 내린 결정이 늘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초보 운전자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길에 익숙해지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성장이란 결국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불확실성과 불편함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디딤돌이다. 성장은 편안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마찰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Get comfortable being uncomfortable.
불편함에 익숙해져라.”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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