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Dec 16. 2019

와튼 MBA 흑역사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면

흑역사 1.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는 토론식 수업에 대한 적응이었다. 매일매일의 수업에는 미리 읽고 준비해 가야 하는 일종의 예습 개념의 숙제 같은 것이 있었다. 학생들은 ‘리딩 어사인먼트(reading assignment)’라고 부르는 그 과제물들을 통해 그날 수업에서 논의될 내용에 대해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본인의 분석과 의견까지도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수업은 주로 교수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자 오늘 토론할 기업의 사례에서 주요 쟁점과 해결방안이 무엇인지 누가 먼저 말해보겠나?” 뭐 이런 식이다. 사실 “누가 말해보겠나?” 하고 물어보는 것은 양반이고, 그냥 무작위로 대놓고 “태진, 자네가 한번 얘기해 보게” 하고 찍어서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매일 읽고 준비해 가야 하는 자료의 분량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웬만한 원서 한 권 정도 될 것 같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영어로 읽는 속도가 다른 친구들보다 느렸기 때문에 자료를 읽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읽는 것도 읽는 것이지만 사례에 제시된 각종 데이터나 단서들을 종합해서 나름대로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까지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매일의 수업 준비는 나에게 너무나 큰 고역이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준비해야 하는 수업이 하루에 보통 두세 과목씩 되었다. 맨날 수업 끝나면 파티하고 노는 것 같아 보이는 친구들이 다음날 수업시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막힘없이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었다. 첫 학기 때에는 그래도 어떻게든 따라가 보겠노라고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잠을 4시간 정도밖에 못 자는 날도 허다했다. 고 3 때도 7-8시간을 잤던 내가 늘그막에 이 무슨 개고생인가 싶었다.

그런데 하루는 밤에 다음날 수업을 준비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다음 날. 수업을 들어가는데 무척 겁이 났다. 최대한 구석진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원래 자기 자리 앞에 잘 보이도록 놓아야 하는 명패도 교수님 눈에 안 띄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으로 살짝 가려서 놓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교수님은 맹렬하게 질문을 퍼부으며 수업을 진행했다. “스콧, 자네가 설명해보게.” “라일라, 자네가 반박해보겠나?” 책상 밑에서 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의 눈이 언제 나에게 꽂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질문을 받는다면 대대적으로 망신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도살장에 끌려간 동물 마냥 두려움에 떨던 나는, 급기야 가방과 책 등을 모두 제자리에 그대로 둔 채 살며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조용히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정말 부끄럽고 자존심 상했다.




흑역사 2.  나는 MBA를 하면서 헬스케어 매니지먼트(Health Care Management)라고 하는 특수전공을 이수했다. 이를 위한 필수과목 중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의료체계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 있었는데, 의료보험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한국과는 달리 사보험 체계인 미국 의료시스템은 나에게 너무나 생소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복잡다단한 미국의 의료 운영 체계들을 설명하는데 HMO, PPO, PBM 등등의 약자들은 왜 그리도 많이 난무하는지 나는 흡사 외계어를 공부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다른 많은 과목이 그러하듯 이 과목에서도 ‘퀴즈(quiz)’라고 불리는 간단한 시험을 자주 쳤다. 한 번은 시험이 있고 난 후에 교수님이 답안지를 돌려주시더니 칠판에 학생들의 최저 점수와 최고 점수를 써서 점수 분포를 알려주셨다. 그런데 칠판에 적힌 최저 점수가 바로 내 점수가 아닌가! 수업하는 내내 멍한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비록 유학을 떠나올 때 ‘굳이 상위권에 들려고 애쓰지는 말자’라고 맘 편히 먹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꼴찌를 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 내용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혹 인도식 억양이나 흑인 발음이 강한 교수님들의 말을 들을 때면 애를 먹기도 하지만 그 과목의 교수님은 CNN 앵커만큼이나 알아듣기 쉬운 표준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이미 성적이 꼴찌라면 이제 나는 이 과목에서 낙제하는 것만 남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시간 내내 혼자서 고민하다가, 강의가 끝나고 나서 조용히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저… 실은 오늘 최저 점수를 받은 학생이 바로 접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다행히 교수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박사과정의 대학원생 한 명을 나의 전담 튜터(tutor)로 붙여주셨다. 나는 학기말에 그 과목의 낙제를 간신히 면했다.




흑역사 3.  MBA는 일반적인 유학과는 달리 공부만 해서는 그 가치를 100% 얻을 수가 없다고들 했다. MBA를 하는 동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과외활동 기회들이 많이 있고 그런 활동들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경험들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도 막상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기적적으로 얻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가서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의욕에 넘쳤었다. 하지만 정작 학교생활을 시작해보니 현실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학과 공부를 따라가기도 너무 벅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린 딸아이를 둔 30대 아빠 학생이 20대의 미혼 친구들 하는 것들을 다 따라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행사들에서 점점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반(‘cohort’라고 부른다)의 사교행사들을 담당했던 친구가 고맙게도 기회만 있으면 계속 어떻게든 나를 끼워주려고 애썼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려 노느냐고 묻길래 한국의 노래방 문화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눈이 반짝하면서 나도 노래방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응. 나도 한국에 있을 땐 많이 다녔지.” 친구는 다음번 우리 반 전체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번에는 노래방에서 할 예정’이라고 공고를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꼭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친구가 고맙기도 했고, 모처럼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신나기도 했다. ‘무슨 노래를 하지? 잘 부르는 팝송도 없는데.’ 그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음향기기를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할 수 있을 거라며 그렇게 하면 한국 노래도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아직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김건모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행사가 있는 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친구들과 몰려서 ‘노래방’으로 갔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간 곳은 내가 생각한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저 노래방 기기 한 대가 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바(bar) 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손님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내가 잘 적응 못하는 전형적인 미국 선술집 분위기였다. 행사를 주최한 친구가 마이크를 잡더니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Bar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도 하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하면서 점점 흥이 오르자 나머지 우리 반 친구들도 마이크를 앞다퉈 잡으며 노래들을 불러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전혀 예상치 못 했던 분위기에 오히려 슬슬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때 나를 이끌고 왔던 친구가 마이크를 나에게 건네며 한곡 하라고 했다. 내가 주저주저하니까 우리 반 친구들 전체가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태진! 태진! 태진!”


그때 그냥 마이크를 잡았어야 했다. 잘하건 못하건, 반주가 있건 없건, 남들이 김건모 노래를 알아듣건 말건 그냥 그때 마이크를 잡고 미친 척하고 노래를 불렀어야 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하지 못 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다. 나를 배려해 준 친구들에게 너무 고맙고도 미안하고, 그걸 해내지 못한 내가 너무 바보스럽다.





내가 MBA를 하러 간 것은 꽤 무모한 짓이었다. 가진 돈도 없으면서,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로만 억대의 빚이 생길 것이 뻔한데도 좋은 학교에서 받아준다고 앞뒤 안 가리고 훌쩍 가버렸다. 거기서 배운 것? 솔직히 지금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요즘 일하면서 써먹는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MBA를 한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아마 거기서 내가 얻은 것은 재무, 회계, 전략 등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늘 최고일 수는 없다’는 자각, ‘그렇지만 나도 버티는 재주는 있더라’는 자신감,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는 너무 빼지 말고 해 버려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는 교훈 같은 것들이 아닌가 싶다.


간혹 ‘나도 MBA를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친구들이 있다. 그럴 때 나의 조언은 ‘요즘 세상에 그거 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금전적으로만 따지면 다니던 직장에서 계속 좋은 경험 쌓고 잘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아서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으면 저질러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왕 저질렀다면 그 기회를 최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다. 사실 MBA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 대부분의 일이 다 그런 게 아닌가 싶다.

(2016년 8월)

이전 19화 가치평가 (Valuation)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