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의 봄을 기다리며
과학과 예술 그 사이 철학 9/
지난주 2월 4일은 입춘(立春), 말 그대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고개를 들어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날이었다. 봄의 상징은 무엇일까? 녹아 흐르기 시작하는 개울물이나 평소보다 따사로워진 햇살이 될 수도 있지만, 모든 이들을 설레게 만드는 벚꽃이야 말로 봄의 상징이자 전령사일 것이다. 오늘은 잠들어있던 망울을 터뜨리며 한 해의 시작을 우아하게 알리는 이들,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예정이다.
먼저, 꽃이란 식물이 번식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식기관이다. 화려하고 향기롭게 피어난 꽃은 자연에 존재하는 벌, 개미, 새 등 다양한 이들을 유혹해 자신들의 대를 이어가게 한다. 꽃가루를 널리 퍼트리고 생식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끝마친 꽃은 며칠이 채 되지 않아 시들어 사라진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감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꽃의 존재감을 이야기하면 색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오색찬란함을 뽐내는 꽃들은 그들의 종류만큼이나 많은 색을 가지고 있다. 꽃의 계절인 봄만 해도 병아리같이 샛노란 개나리가 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는 이들의 가슴을 몽글거리게 만드는 연분홍빛 벚꽃이 거리를 점령한다. 5월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는 빨강, 노란색, 심지어 검은색마저 존재한다. 팬톤보다 수없이 많은 색을 가지고 있는 꽃들은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무화과는 꽃을 피우지 않는 열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그 열매의 정체가 바로 꽃이다. 또한 화사하고 다채로운 일반적인 꽃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꽃들도 있다. 구부정한 자세를 한 흰머리의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할미꽃, 정글 깊숙한 곳에서 고기 썩은 악취로 벌레들을 유혹하는 거대한 꽃 라플레시아, 사람의 시체가 썩는 냄새를 풍기는 시체꽃이 그 예다. 그리고 개나리, 벚꽃, 장미같이 봄을 수놓는 꽃들부터 겨울에 피는 동백꽃, 50년에 한 번 피어나는 대나무꽃, 타오르는 사막을 살아가며 1년에 며칠만 꽃을 피우는 선인장까지.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뽐내는 꽃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매력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색감과 다양함으로 무장한 꽃은 벌과 나비뿐만 아니라 인간들까지 매혹시켜 왔다. 꽃은 단아함을 최고의 미로 여겼던 조선의 동양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사용되었고, 서양미술사에 굵직하게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내왔다. 비통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칼로(Frida Kahlo de Rivera)는 그녀의 자화상 속에서 화려하고 풍성한 꽃을 얹은 채로 등장한다. 이는 마치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꿋꿋하게 견디는 그녀의 의지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역시 꽃피는 아몬드나무와 해바라기꽃이다. 꽃의 존재는 예술가들에게 화려함과 매혹을 넘어 고통의 치유까지 가능케 한 것이다.
게다가 꽃은 회화 속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나태주의 풀꽃 또한 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어질 수 있었다. 꽃을 주제로 한 시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춘수 시인의 꽃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예찬을 꽃에 비유하여 아름답게 풀어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꽃은 예술의 소재를 넘어 인간의 삶과 함께한다. 남송의 시인 양만리는 인생을 꽃에 빗대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라 표현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속 깊은 교훈까지 전해주는 꽃은 온실 속 화초, 꽃길 등 다양한 비유로 사용되며 사람의 이름으로도 자주 쓰이고 있다.(아마 지인 중 장미 혹은 나리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꽃은 결혼식과 같은 축복의 순간부터 인생의 마지막 장면인 장례식까지 함께한다. 그야말로 꽃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인 것이다.
곧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일 꽃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세상의 80억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꽃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별남을 위로받을 수도 있고, 길에 피어난 수수한 풀꽃을 보며 아름다운 시와 예술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간 시들어 사라질 꽃을 통해 삶의 유한함을 상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식물은 이렇게 꽃을 통해 자신의 후대뿐만 아니라 위로와 예술 그리고 인생의 소중함까지도 퍼트리고 있는 중이다. 코앞의 봄을 기다리며 쓰게 된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모두 꽃길만 걸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