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교 동기들을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꿈만 좇던 시절에 만난 우리들. 이제는 그 꿈이 현실이 됐고 그걸로 월급도 타고 밥도 먹고 사니 실로 성공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창 추억에 젖어 우리 이랬잖아~ 그랬잖아~ 이야기하던 순간 친구가 너 별명 기억나?라고 묻는 거다. 글쎄. 내 별명이 뭐였지? 나이가 들수록 별명이 사라진다. 별명보단 직함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서겠지? 그리고 이제 나이도 나 이인만큼 내 주변에서 별명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도 없고. 뭐였더라~ 심드렁하게 말하니 친구가 톡쏘며 말한다. 너 코카콜라였잖아.
맞다. 내 별명은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코카콜라를 못 마셔서도 아니고. 내 발언이 탁 쏘는! 코카콜라 같다는 거였다. 당시에는 '사이다' 발언 같은 게 없었는데. 사이다! 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면 알까. 친구들이 좋게 포장해 코카콜라라는 별명이 쥐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 아득바득 살았나 싶다. 나는 수업을 들을 때 맨 앞줄에 앉아 미친 듯이 노트필기를 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과 선배 중 노트를 빌려달라는 부탁에도 '아뇨 싫은데요. 같이 수업 들었잖아요 우리'라고 톡 받아쳐냈던 것이다. 와 독한 기지배.
막내작가로 살면서는 코카콜라 정체를 숨기며 살았다. 그러던 중 연차가 쌓이며 콜라가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로 들어간 프로그램에서 한 피디가 '근데 왜 OOO작가는 날 선배라고 안 불러?' 뭔 소리야. '네?' '아니 다른 작가들은 선배라고 부르는데 늘 피디님이라고 부르길래' '피디님이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피디님 밑에 있는 조연출들은 저에게 작가님이라고 하잖아요. 선배라고 안 하잖아요? 조연출들이 저에게 선배라고 하면 저도 선배라고 불러드리는 거 생각해볼게요' 그 피디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나에겐 일종의 텃세로 느껴졌다. 너 이 방송국 처음이지? 우린 다 어렸을 때부터 봤던 사이야 뭐 그런? 그 후로 그 피디님과 묘한 기류가 형성되긴 했으나 일하는데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작가들도 그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쓰지 않게 됐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호칭에 민감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각자 자기 일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호칭 때문에 일 못하는 건 아니잖아. 더군다나 가장 개방적이고 트렌디한 방송국 사람들이 이런 고지식한 사상에 얽매어있다니.
방송국에서 기본 적으로 호칭은 작가님, 피디님, 막내작가, 때론 오빠, 언니, 선배님이란 호칭이 난무하지만 선배 대접을 받겠다고 호칭을 정정하는 피디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 피디는 선배라는 호칭을 통해 조금 더 편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랐겠지만. 우리 일로 만난 사이 아닙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한 따까리 하는 작가, 기 센 작가라는 호칭이 생겼다. 처음엔 이 별명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작가들은 피디들과 아주 잘 지내는데 혼자 고집불통 대마왕처럼 행동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나로 인해 내 밑에 누군가가 또 다른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언제든지 난 콜라처럼 터질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