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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ㅣ Nov 27. 2023

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류를 종합하여 분석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유명한 를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안자라고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기류는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 라캉과 같은 후기 구조주의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리오타르는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기류들을 분석함과 동시에 미래사회에 관한 제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그는 명료하게 정리하여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담아내었다.


"이 저술의 연구 대상은 가장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의 지식의 조건이다. 나는 이 조건을 기술하기 위해 포스트모던(postmoderne)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다. 이 용어는 현재 미국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 들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19세기말 이래 과학, 문학, 예술 분야의 게임 규칙들을 바꾸어 놓은 여러 변화들과, 그 변화에 따른 현대 서양의 문화 상태를 지칭한다. 본 연구는 이 같은 변화들을 서사의 위기라는 문맥 속에 위치시길 컷이다."-포스트모던의 조건 p.19


 일상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란 단어를 종종 듣거나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잘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포스트모던'은 은유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포스트모던적이다라고 꾸며줄 때에 많이 사용되곤 하지만, '포스트모던'적임 그 자체에 대한 논의는 어렵게 느껴지거나 논의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 언어 그 자체의 의미로는 탈근대적인 것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근대로부터의 벗어남.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탈피하고자 하는 근대적인 것, '모더니즘'은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리오타르는 모더니즘을 거대서사(메타서사)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과학은 언제나 서사와 갈등 관계 속에 있어 왔다.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서사는 우화로 판명된다. 그러나 유용한 규정들의 진술에만 스스로를 한정시키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한, 과학은 스스로의 게임 규칙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그래서 과학은 스스로의 지위에 관한 정당화의 담론, 즉 철학이라는 담론을 생산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메타 담론(metadiscours)에 근거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모종의 거대 서사(grand recit)에 공공연히 호소하는 모든 과학을 지칭하기 위해 '근대적(moderne)'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거대 서사에는 정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학, 합리적 주체 혹은 노동 주체의 해방, 또는 부의 창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진리치를 갖는 어떤 진술의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합의(consensus)라는 규칙은 합리적 정신들 사이에 만장일치가 가능하다는 조건 속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계몽서사이다. 계몽 서사에서 지식의 주인공은 보편적 평화라는 선의의 윤리-정치적 목적을 지향한다."-포스트모던의 조건 p.19

 

 리오타르가 '근대적'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서구 열강의 계몽주의, 종교, 마르크스주의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근대적 거대 서사들은 합리성과 목적성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합리성과 목적성에 근거에는 옳음이 있음, 불변의 가치가 있음과 같은 명제들이 전제가 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들을 토대로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는 신념을 가진다. 이러한 것들을 근대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탈근대' 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것들을 어째서 의심하며 탈피를 주장하는 걸까?


 우리가 근대성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역사적 경험들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을 통한 역사의 진보에 관한 신념은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대량 살상무기를 통한 대량 학살, 이례 없는 파괴활동들. 이러한 결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사건들 또한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원동력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며 기존 체계 내의 논의 외에 아무런 회의 없이 소화될 수 있는 사건들이었을까? 유럽의 지식인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이제 이들이 두려워하며 경계하게 된 주된 적은 앞서 말한 비극을 촉발하게 한 전체주의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대 담론의 형성과정이었다.


"아주 단순화해서 표현하면, 나는 포스트모던(postmoderne)을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라고 정의한다. 이 회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여러 과학 진보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 또한 회의를 전제한다. 메타 서사라는 정당화 장치의 퇴화에 가장 두드러지게 상응하는 것은 형이상학과 과거 그에 의존했던 대학 제도의 위기이다. 서사기능은 이제 그것의 기능소와 위대한 영웅, 그리고 그것의 큰 위험 요소들과 장엄한 항해, 위대한 목적 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것은 서사적 언어 요소들의 구름, 즉 서사적이며 동시에 지시적이고 규범적이며 기술적인 언어 요소들의 구름 속으로 흩어져 나가고 있다. 각각의 구름 속에는 그 종류의 구름에만 고유한 화용적 경합가들(valences pargmatiques) 이 실려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이 결합가들의 교차점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안정된 언어 조합들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성립시키는 조합들의 속성이 반드시 소통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미래사회는 구조주의나 체계 이론과 같은 뉴턴적 인간학의 영역에 들어맞는 사회라기보다는 언어 입자들의 화용법에 더 잘 들어맞는 세계이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언어 게임들, 다시 말하면 언어 요소들의 이질성이 있다. 그것들은 이런저런 요소들을 혼합한 제도들과 국지적 결정만 탄생시킬 뿐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p.21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 총체성의 담론을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무너진 총체성을 증언하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환상을 비판하고자 한다. 리오타르는 현대에 무너진 총체성을 다시 규합하려는 지배적 거대서사를 자본주의라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근대적 거대서사가 허용하고 있는 무제한적인 욕망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욕망은 구조주의가 밝혔던 것처럼 그 욕망이 우리 자신의 본래적 욕망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은폐되어 침투해 있다. 자본주의의 의지는 자본주의를 합리성 속에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욕망을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근거, 초월적 환상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세계관속에서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마치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를 이렇게 표현하면 리오타르가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 또한 근대적 거대서사의 갈래로 생각한다. 리오타르는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붕괴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제한적 표상인 자본주의의 욕망을 폭로하는 철학적 시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로를 통해 오로지 탈중심화와 인간성을 외칠 뿐이다.

 

"우리는 다소 익살스럽게 과학 지식이 '위기 해결', 즉 결정론의 위기 해결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결정론은 수행성을 통한 정당화가 기초해 있는 가정이다. 수행성은 투입/산출의 비율에 의해 정의되므로 투입이 이루어지는 체계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체계가 도함수를 포함하는 연속 함수로 표현될 수 있는 규칙적 '행로'를 따름으로써 산출의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전제도 깔려 있다. 이것이 효율성의 실증주의 '철학'이다. 나는 정당화에 관한 마지막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 이런 효율성 철학과 반대되는 증거로 뚜렷한 몇 가지 예를 제시해 보겠다.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하는 목적은 몇몇 실례를 기반으로 해서 포스트모던 과학 자삭 그 자체의 화용법이 수행성 추구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것이다. 과학은 실증주의적 효율성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증거리르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은 반증, 다시 말해 이해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창안'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명제를 지지한다는 것은 '역설'을 찾아내고 추론 게임에서 새로운 규칙으로 그것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경우에도 효율성 그 자체가 추구되지는 않는다. 효율성은 기금 기부자가 마지막으로 해당 문제에 관심을 갖기로 결심했을 때 남게 되는 여분으로, 그것도 때로 뒤늦게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이론과 가설, 그리고 고새로운 진술과 관찰에 언제나 반드시, 그것도 반복적으로 나타는 것이 정당성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런 과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 자체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p.187


 리오타르가 경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리오타르는 '비판하지 않는 인간'을 경계하는 것 같다. 물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인간 또한 비판하지 않는 인간일 것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리오타르의 염려처럼 깊은 사유를 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달된 대중매체들은 얕은 지식을 얻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정보 과도화를 통해 우리에게 침묵의 시간은 허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의 사유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침묵 없이 정보를 수용하기만 하는 인간은 기계적으로 인과적인 반응만을 하는 그저 그런 생물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성을 위하여 침묵의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되찾아가야 하는가? 어쩌면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생명의 연명수단보다도 앞서서 질문되어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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