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회화의 시작은 첫 획을 긋는 것이다. 'Stroke'는 그림에서 한 획의 선을 긋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화에서 여백과 선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선과 여백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선은 여백의 전제하에 그어지며 여백은 선에 의해 분리되어 규정된다. 여백은 어떠한 것으로 채색된 것이 아닌 채색되지 않은 것으로서 색칠됨과 구별된다. 여백은 방치됨으로써 무언가에 대한 포용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작품 내의 여백은 조화와 소통의 가능성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선은 여백을 덮지 않는다. 선은 여백을 나누는 역할을 가진다. 선은 여백을 나눔으로써 조화의 다양한 양태들을 표현하게 해 준다. 하지만 선은 명확한 경계가 아니다. 선은 두 개의 여백이 상호 침투하고 있는 포착할 수 없는 심연의 영역이다. 따라서 여백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선 또한 소통과 조화의 장으로서 작용한다.
그렇다면 선을 눈앞으로 끄집어내어 다시 그것을 캔버스 위에 담아낸다면 어떠한 것들이 표현될까? 이렇게 이루어지는 선의 확장은 그어진 선을 마치 손으로 잡아 눈앞으로 끄집어내어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장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눈앞으로 온 확대된 선은 소통과 조화의 장 그 자체로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심연의 한 순간을 담게 된다. 임충섭 작가의 작품에는 선의 확장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 <Untitled, 2012>에서는 선의 확장성이 잘 표현되고 있다. 확장된 선의 세계는 선의 물리적인 영역의 확장을 의미함과 동시에 개념적인 확장의 의미 또한 담고 있다. <Untitled, 2012>에서는 다양한 서사를 가진 물질들의 조화를 꾀하는 장소로서 확장된 선의 세계가 표현되고 있다. 각각의 물질들은 과거로부터 '지금 여기'까지로 이어지는 고유한 역사성을 지닌다. 작품 속의 고유한 역사들을 가진 이질적인 물질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상호 침투함으로써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임충섭 작가가 표현하는 물질들은 이러한 중첩상태를 가짐으로써 상호 간의 조화를 꾀한다.
<Untitled> 2012, Acrylic and U.V.L.S. gel on canvas
선은 평면이 아니다. 선은 상이한 두 존재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영역이다. 게슈탈트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어떠한 물체를 인식하기 위해선 인식대상인 물체와 물체를 둘러싼 배경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물체를 인식하기 위하여 배경과 물체를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임의적인 선을 가정한다. 이러한 선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시시각각 포착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어떠한 물체를 인식하는 행위는 물질적인 형태의 인식 이전에 이미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지 '개념적 이해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개념적 이해됨'은 일종의 문화적 코드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여우"라는 단어를 떠올린다면,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은 사막여우를, 북극에 거주하는 사람은 북극여우를 떠올리듯이, 각자 자신에게 가장 친근한 여우의 이미지를 상상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지적인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문화적인 코드로 대표적인 것이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다.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과 같은 코드는 문화 속에 광범위하게 내재되어 일상 속의 친근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동시에 일상과 거리가 먼 문화적 코드는 이질적임과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은 상이한 문화적 코드로 느껴지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점진적인 변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들로 이해될 수 있다. 임충섭 작가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사이에 그어진 선의 영역 또한 끄집어내어 조화의 장을 목격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임충섭 작가의 <Space-Fossil@Dialog> 연작들에는 서양의 기하학적 코드와 동양의 자연주의적 코드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중첩은 동서양 사이에 그어진 선을 확대하여 조화의 장을 포착할 수 있는 경험을 작품의 감상자들에게 전달한다.
<Space-Fossil@Dialog. 2-13> 2000-2011, Mixed medea, found oject, box, etc.
배경과 대상을 구별하는 선이 임의적이라면,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불명확함 속에 놓여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모든 물체는 항상 '~스러운 것'과 같이 임의적으로 간주될 뿐이다. 불명확한 세계 속에서 완벽한 명확성으로의 도달이 불가능해진 존재들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무언가'의 형식을 통해 비유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들' 또한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무언가'이다. 그러므로 '무엇들'은 자신의 규정을 항상 옆의 무엇에게 미루게 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차이와 조화만이 있을 뿐이다.
명확함이 부재한 세계에 대한 고찰을 임충섭 작가의 <Untitled - Found Objects>에서 느낄 수 있다. 임충섭 작가는 규정됨을 회피하는 물체들을 나열함으로써 물체들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물체들을 규정할 때, 물체들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무언가' 임과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들'이다. 규정됨 없이 오로지 차이들의 조화를 통하여 물체들은 개념적으로 상호 침투하며 소통한다. 각각의 물체들은 화자이자 청자가 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소통의 장에서 각각의 개체들은 강요됨 없이 상호 인정과 배려에 의해 형성된다. 서로가 서로의 인정 없이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소통해야 한다. 임충섭 작가는 작업을 통하여 소통과 조화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Untitled - Found Objects> 2000s-2020s, Mixed media on found objects, Dimensions variable
임충섭 작가님의 《Stroke》에서 저는 많은 감정들을 느꼈습니다. 다문화국가의 상호존중을 위한 공익캠페인 같은 느낌과 함께 관람자들을 긍정하며 응원해 주는 따스함이 공존했던 것 같아요. 세련된 아름다움도 포함해서요! 우리는 다양한 집단이나 개인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저는 이러한 다툼이 현대사회의 피로로 인한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임충섭 작가님의 작업을 보고 나니, 여러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 같았어요. 여러분들은 임충섭 작가님의 《Stroke》를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함께 나누어봤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