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언제인지 모르게 우리의 곁에 다가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것은 조금 더 먼 과거로 도망가거나 잘게 쪼개져 공기처럼 흩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가 살아온 역사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그 근원을 온전히 포착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여 영감을 받아 탄생한다. 그리고 탄생한 이미지들은 다시 인간과 교류하며 재생산되어 서사를 구성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들의 서사적 면모는 점차 해체되고 있다. 이전보다 더욱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굳건했던 '전통'이라는 가치는 안정적이고 균일한 서사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탄생하는 이미지는 그 소통 행위자체를 대변해 준다. 우리가 발자국을 보면 누군가의 지나감을 연상할 수 있듯이, 이미지는 어떤 존재를 표현해 주는 존재자로서 존재의 서사를 구성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우리들은 다양한 매체의 발전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방대해진 정보들은 하나의 균일한 해석으로 통합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이 혼재하는 교착상태에 우리를 머물게 한다.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이미지들은 누군가의 존재를 대변해주지 않으며, 그저 우리 주위를 떠돌기만 한다. 자신밖에 없는 무인도에서 발견한 발자국의 주인을 유추하는 것은 쉽지만, 도심 속에서 발견한 발자국의 주인을 유추하기란 어렵다. 도심 속의 발자국은 '누군가'의 발자국이기보다는 '그저' 발자국이다.
정건우 작가의 <Ragnarok-Redemption of ruins>는 어딘가 익숙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묘사하고 있다.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던 승리의 여신 니케의 동상이 작품 속에서는 폐허 속에 방치되어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니케의 뒤에 펼쳐져 있는 건축물들은 어떤 시대의, 어떤 문화의 것인지 모호한 상태를 통하여 관람자에게 흐릿한 기시감만을 전해준다. 풍화되고 방치되어 폐허가 되어버린 건축물들에서는 정적인 분위기가 주위를 맴돈다. 인간의 생활이 느껴지는 활력이 전부 소진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표현하면 작품 속의 장소는 폐허가 '되어버린'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폐허가 되기 이전의 온전한 상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는 오로지 흐릿한 기시감 만이 맴도는 폐허의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Documentary-Accordion Perfume> 2023, 장지에 안료와 먹
서사가 단절된 이미지는 점차 가벼워진다. 혹은 단발적이다. 이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서사'들은 새로움에 목마른 자들에게 진부하거나 귀찮은 것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이들은 새로움을 위하여 과감하게 이미지의 전통적 서사들을 단절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오직 새로움만을 바란다면, 단순한 자극추구 이외의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그들이 자극의 해소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 끝은 항상 폐허와도 같은 풍경만이 반겨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극과 운동의 궁극적인 해소는 폐허와 죽음과도 같은 소진된 안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오로지 새로움만을 추구한다면, 그들이 만든 이미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의 개인적인 향수와도 같은 파편적인 추억들일뿐이다.
작가의 <Documentary-Accordion Perfume>에는 여러 가지 문화 양식의 건축물들이 나열되어 있다. 일본풍의 가옥부터, 이슬람풍의 발코니, 유럽풍의 성당, 그리고 전신주까지, 이색적인 건축물들이 하나의 장소에 혼재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만국박람회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모인 장소는 전형적이지 않다. 이곳은 전통적인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특이하며 새롭다. 그러나 정건우 작가의 작업은 작품 속 장소를 박람회와 같은 전시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미지들이 그저 혼재된 풍경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모두 어딘가 본 듯한 이미지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지는 않는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하나의 서사로 통합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하나의 균일한 법칙으로 정갈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 와해되어 방치된 폐허와도 같은 상태로 남겨져 있다.
<Ragnarok-Moai mystery> 2023, 장지에 안료와 먹, 외 2
부유하는 현대적 이미지들은 긴 호흡으로 느끼기 어렵다. 맥락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발적 이미지들은 잠시 시선을 머물게 할 뿐, 금세 다른 것들로 대체된다. 맥락이 단절된 이미지들은 간편하다. 그러나 간편해진 이미지들에게서 친절함을 느껴야 할지, 불편함을 느껴야 할지 의문이다. 간편함이 자극의 과잉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도 어딜 가나 자극.. 또 자극, 맥락 없이 맥락에 대한 기대만이 떠다니는 공허함, 다르게 표현하면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혼재된 풍경을 담아내는 작업 외에도, <Ragnarok-Moai mystery> 외 2점과 같이 여러 이미지들을 전시하는 작업 또한 시도하였다. 작품들 속 조형물들은 특정 서사들을 함축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한 작품들 속 조형물들이 경건하거나 고귀하지만은 않다. 이것들에 앞서 해체됨을 앞둔 그늘짐이 작품들을 에워싸고 있는 듯, 비통함과 침울함이 먼저 관람자에게 다가온다. 자극 과잉의 사회 속에서, 서사들의 단절을 통해 가벼워진 이미지들과 우리의 관계가 소통보다는 소비에 가까워짐을 느낀다. 혼란스럽게 소비만을 반복하여 도달하는 폐허의 풍경을 정건우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Ragnarok-skyfall> 2023, 미색장지에 먹
정건우 작가님의 《이미지의 폐허》에 저는 많은 공감이 되었어요. 빛바랜 이미지들을 묘사하는 작업에서 자극과잉의 현대사회 속 안정을 망각한 채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방황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미지들의 간편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요즘, 오히려 일상 속에서 우리들은 간편함이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종종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넷플릭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어떤 것을 봐야 할지 당황스러운 것처럼요. 적당한 불편함이 오히려 개인에겐 편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을 통해 간편함과 불편함의 조화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가벼움의 반복을 통한 방황 끝에는 어떠한 풍경들이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여러분들은 정건우 작가님의 《이미지의 폐허》를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함께 나누어봤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