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ybk Apr 16. 2024

나: 영감주머니 5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의 무지함과 선의 세계를 밝혔다. 일상을 살아가는 인들은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라 믿으며 그곳에만 머문다. 하지만, 이중 호기심을 가져 지혜를 탐구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림자의 뒤를 돌아보며 그 너머에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점차 밝아지는 빛의 세계로 걸음을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빛에 의해 고통을 느끼지만, 점차 눈앞이 또렷해져 태양에 의해 비추어지는 참된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참된 세상을 발견한 지혜로운 이는 동굴 안에 머물러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자 어둠을 헤치며 동굴 속으로 돌아간다. 친구들이 너무나 생소한 그의 주장에 비웃더라도 그는 그들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전하려 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철학자의 사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하여 동굴의 비유를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바로 태양을 바라보면 눈은 실명을 한다는 관점이다. 선의 이데아를 모든 것의 가능 근거로서 부동의 원동자라 생각한다면,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순수 욕망의 가능 근거로서의 결여(혹은, 포착불가능한 실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욕망의 최종적인 완료는 운동의 정지, 즉 죽음이다. 이것이 결여의 완전한 해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태양을 바라보면 실명을 한다는 사실은 동굴의 비유에서 철학자의 사명에 새로운 고민을 안겨준다. 어떻게 동굴에 수인들에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권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무엇을 위해 수인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 설득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수인의 곁에서 오랜 시간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긴 고뇌의 시간이 흘렀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수인이었다. 수인은 고뇌하는 철학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한다. 그의 고민은 변함없이 반복되는 이해된 일상의 지루함과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깊은 허무함이 자신에게 왔을 때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수인의 고민을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깨우치며 수인에게 제안한다. “나를 따라오면 내가 ‘새로운’ 것을 알려주겠다.” 그리고는 둘은 함께 뒤를 돌아 동굴밖으로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 수인은 나아가며 처음 마주하는 생생함에 경탄한다. 그는 태양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의 새로움에 경탄한다.


 철학자는 새로움에 대한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지혜란 것을 깨우친다. 새로움을 사랑하려면 그것을 느끼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라. 새로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나간 것들을 사랑하라. 영원이 아니기에 새로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신의 유한함을 사랑하라. 죽음이 당연한 세계 속에서 그것에 잠시 저항하는 생명의 신비를 축복하라. 그리고 이것들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라. 이것을 위해 철학자가 수인의 곁에서 고뇌하던 시간이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작업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눈앞의 이미지들 속에는 흔적도 터치도 덮임도 없다. 기계적인 생산에 의한 배열들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매끈한 삭막함의 이질적임은 친숙한 생생함의 부재로 인한 낯섦과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한갓 구름만 휘젓는 것 같은 단절감 속에서 이 부재함을 통해 담을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가치들을 요청.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모든 회화에 대한 찬양다.


2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거울을 바라본다. 그러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감정을 비추는 거울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어떠한 대상들에 자신을 비춰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있는 걸까.


 감정을 비추는 거울들을 표현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사유와 감정의 차이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유란 우리가 의식하여 판단하는 것. 바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 또한 의식하여 사고하는 것일까? 감정은 느끼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가 의식하여 계산적인 의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에 의해 '느껴지는 것'에 가깝다. 그러므로 감정은 사유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서들의 집합이다. 이러한 구분이 감정을 느끼는 데에 유용하다.


 그렇다면 감정은 어떻게 느껴질까? 감정들은 우리의 속을 항상 떠돌고 있다. 하지만 얼굴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들이 우리의 속을 떠도는 상태에선 스스로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감정을 응집시켜 그것을 느끼게 해 줄 무언가, 즉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어떠한 대상 '감정의 거울'들에게 비추었을 때 비로소 그것에 반사되어 비치는 자신을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다. 감정은 사고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흔적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감정을 비추는 거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물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비춰볼 때, 자신의 감정을 비출 거울을 찾지 못해, 쌓여버린 감정에 마음이 체한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자신이 인지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함과 슬픈 감정들을 먹먹하게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표현할 길이 없어 감정과는 전혀 다른 행동들로 표출되는 버릇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소망했다. 그들 앞의 맑은 거울이 되어주기를. 내 앞의 상대방을 또렷하게 비춰주는 맑은 거울이 되어 타인의 갈증들을 덜어주길. 그리고 그런 인상의 사람이 되어 그들에 비추어진 나를 좋아하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영감주머니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