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건.
나와 제대로 마주해보니, 그동안 우울증이었던 걸 알게 됐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변화했지만, 우울증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나의 상황을 말했다.
그런데도 변하는 건 없었다.
가족들에게 내 상황을 이야기한 건, 변화한 나의 성격 덕분도 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방황하고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성장하고, 변화한 나를 만들어낸 거에 대한 성취감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고, 스스로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방향을 찾아가던 그 과정은 아직 이십 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던 내겐, 어려웠다. 홀로 너무 외로웠다.
과정이 다 지나쳐 온 후이지만, 늦었어도 가족의 힘을 받고 싶었다.
물론, 변화한 나에게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고 시행착오의 과정도 필요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를 챙겨주는 건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힘든 나에게 하소연을 털어놓고, 감정과 상처가 되는 말들을 쏟아붓는 것 정도는 stop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서운했다. 무척이나.
서운함이 점점 커져가던 중, 엄마에게 폐경기가 찾아왔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너무 걱정됐다.
서운함은 뒤로 하고, 엄마의 기분을 달래 드리고 하소연을 들어드리고 위로를 해드렸다.
바빠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도 나는 최선과 진심을 다해 엄마의 감정들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조금씩 벅차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내가 전화로 챙겨주는 건 한계가 있으니 같이 살고 있는, 옆에 있는 아빠와 동생에게 부탁을 했다.
무엇보다 나는 동생과 함께 짐을 나누고 싶었다.
형제라는 게, 부모를 챙겨야 할 때는 함께 힘을 합쳐 단합이 되고 서로 짐을 나누어 서로에게도 힘이 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원래의 나였다면, 그런 건 다 무시하고 그냥 내가 다 하면 돼.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다 떠안으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변화한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보다 5살 어리지만, 동생도 직장생활을 하는 이십 대 중반에 어엿한 성인이고 함께 부모를 챙길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sos를 했다.
엄마 폐경기니까 신경 좀 써라, 누나가 엄마한테 기프티콘은 보내드렸으니까 꽃 선물은 네가 좀 해줘라.
동생이 알았다고 대답해서 난 그것만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동생은 바쁘다면서 자꾸 뒤로 미뤘다.
이러다 어물쩍 넘어갈 테고, 엄마한테 이 시기가 정말 중요한데.... 걱정됐다.
무엇보다 완경을 축하하는 꽃 선물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그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았다.
초조했다.
기다리다가 결국 동생한테 아직도 안 주고 뭐 하냐고, 엄마 좀 챙겨주는 게 뭐 그리 어렵냐면서 화를 냈다.
그랬더니, 동생은 "누나 같은 사람은 없어!! 엄마랑 아빠가 왜 누나보고 예민하고 부정적이라고 하는지 알아? 엄마가 누나한테 뭔 말을 못 하겠대! 엄마가 누나처럼 버릇없이 그러지 그랬어."라고 말했다.
나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특히 엄마한테는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동생한테 내 욕을 했었구나.
엄마한테 서운한 걸 말하거나 엄마에게 상처받아서 화를 냈던 모든 것들을 버릇없다고만 생각했었구나.
겉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딴생각을 품었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엄마랑 속이야기를 하면서, 부딪히면서 더 단단해졌다고,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구나.
아무리 엄마아빠가 나를 그렇게 비난하고 부정해도, 동생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보고 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구나.
아니면, 내가 그렇게도... 이상한가?
나는 동생한테 어떻게 너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동생은 엄마아빠가 누나 우울증이라는데, 누나만 우울증인 거 아니야. 나도 우울증이야! 나도 요즘 힘들어! XX! 라면서 욕을 퍼붓고, 화를 냈다.
나는 너무 황당했다. 갑자기 나의 우울증이 왜 나오고, 본인 힘든 게 왜 나오는 걸까.
안 그래도 상황이 산으로 가는 것 같아서 어이없고 황당한데,
거기다 핑계까지 대는 것 같아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결국 동생에게 어떻게 이렇게 공감을 못하냐고, 언제까지 나만 부모님 신경 써야 하냐고.
내가 얼마나 혼자 챙기기 힘들면 너한테 도움을 청하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공감능력이 없냐!"라고 말했다.
평소 동생에게(그리고 부모까지) 공감과 이해에 대해 서운함을 가졌던 걸 결국 표출해 버렸다.
그러자 동생은 "XX!!, 그냥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 연 끊자!!" 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멍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는데,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가슴은 두근거렸다. 불안했다. 무서웠다.
그래도 내가 공감능력 없다고 말해서 그런 거니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처음은 안 받다가 두 번째 했을 때였나. 드디어 동생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동생에게 진심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답했다.
나는 그렇게 말한 건 미안한데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쉽게 하면 되냐고 뭐라 하자 동생은 또 화를 냈다.
싸우더라도 풀어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꾸 말꼬리만 늘어 잡는 말싸움만 이어지는 상황이 싫었다.
전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며 모든 걸 내 탓으로,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싫었다.
서로 화만 내다가 동생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불안함이 심해졌다. 평소 지나가는 차를 보다가도 갑자기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서 불안감이 들던 내 상태 때문이었는지, 동생이 걱정됐다. 나도 우울증이라는 동생의 말이 떠올랐고, 나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 내어 동생 친구에게 전화해서 동생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떤지 좀 봐달라고..
공포와 불안은 동생 친구의 위로에 겨우 진정이 됐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여전히 동생은 연락이 없었다.
동생을 미워했다가, 스스로를 자책했다가를 반복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이 나한테 연 끊자고 했다고, 그 뒤로 연락이 안 된다면서 애처럼 울었다.
"오죽하면 그랬겠니"
엄마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냐고, 위로는 못해줄 망정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울면서 말했다.
엄마는 "이따 통화하자"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우는 딸을 두고 어떻게 전화를 끊을 수가 있을까. 내 마음은 이해도 못하고, 나는 버릇없다고 뒤에서 욕하면서 동생은 오죽하면이라며 이해를 해준다니... 서운함을 넘어서 상처를 받았다.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차별한 건 알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요즘 가까워졌으니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엄마를 믿었다.
이따 통화하자고 했으니까 전화하실 거라고 굳게 믿으며 기다렸다.
그러나 엄마는 연락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되어도...
엄마는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