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essay

by 김준완


새벽 3시만 되면
그 긴 손가락
내 목을 조여 오는 그녀
피투성이 된 삶은
두어 번의 각혈 뒤 죽고

새벽 4시 30분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한 듯, 때로는 조롱하듯
삶을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
내 심장에 쏟아지고
울다 지친 나는
당신 앞에
내 원죄를 고백한다

한 번만
호흡을 빌려줘
네 부재는
내 폐를 접는다
원죄의 출처인 너는
말도 없이 떠나고

통곡하던 내 눈은
색을 잃고
날개를 잃는다



[에세이] 푸른 새벽의 삼중주
: 미르차 엘리아데의 렌즈로 본 〈원죄〉의 변주

종교학자 미르차 엘리아데는 말한다.
하나의 현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시의 새벽 역시 그렇다.
목을 조르는 손가락과, 내려다보는 눈빛.
같은 장면이 세 개의 얼굴을 가진다.



1. 탐닉의 각도 — 예속의 미학

어떤 사랑은 목을 조른다.
새벽 3시, 숨이 막히는 순간에야
상대의 존재는 가장 또렷해진다.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은
차갑게 박히는 송곳처럼
심장의 가장 연한 부분을 겨눈다.

“살려달라”는 말은 비굴한 구걸이 아니다.
그것은 너라는 존재를 향한
마지막 남은 의식이다.

떠난 뒤에도
색을 잃은 몸이 기침을 이어가는 이유는
이미 끝난 사랑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중독이기 때문이다.



2. 실존의 각도 — 침묵하는 대상

각도를 틀면, 이 장면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새벽 4시 30분의 시선은
응답하지 않는 어떤 것,
끝내 말을 주지 않는 존재를 닮아 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하나의 짐을 짊어진다.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 졸린 채
삶을 토해내면서도
그 이유를 묻지 못한다.

가장 절박한 순간,
대상은 말없이 사라진다.

남겨진 것은
색을 잃은 눈과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몸뿐이다.



3. 예술의 각도 — 영감이라는 연인

이 비극은 창작의 장면으로도 읽힌다.

시인에게 영감은 다정하지 않다.
그것은 새벽마다 찾아와
숨을 조이고
끝내 어떤 문장을 토해내게 만든다.

그 시선 아래서만
시인은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끌어올린다.

한 편의 문장이 끝나는 순간
그 존재는 사라지고
남겨진 시인은
부서진 호흡과
끊어지는 언어만을 반복한다.

맺음
하나의 장면이
세 개의 얼굴을 갖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손가락의 주인이
사람일 수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묻는다.

당신의 새벽을 조여 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그것은 어떤 얼굴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