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눈망울로 운전하다

essay

by 김준완


— 잊힌 얼굴들 / 지구에 없던 감정의 출현

[詩] 잊혀진 얼굴들

잊혀진 마음과
잊혀진 눈빛이 그리워
앞에 가고 있는 자동차를 쫓았다

광합성을 싫어하는
저 유리창 너머의 삶들은
나의 열여덟 첫사랑을
잃어버렸을까

바람 부는 언덕을
저리도 빠르게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잊혀진 얼굴들을 ·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엔진의 굉음이 비웃듯 멀어질 때
길 위에는 타이어 자국 대신
해진 그림자가 남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멈춰 선 나는
어제의 이름들을
하나씩 지워낸다

쫓아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은
나의 몸뚱이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서툰 고백의 무게인가

이제 언덕 아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면
달아난 창문들이 두고 간 적막만이
내 낡은 소매 끝에 차갑게 고인다

[Essay] 지구에 없던 감정의 출현

자동차 문을 닫는 일은 사소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분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은 처음 기린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닮아 있다.
눈앞에 있으나, 이 세계의 질서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 어떤 존재.

핸들을 잡고 앞차의 붉은 후미등을 쫓는 순간,
내 안에서도 그런 기린 한 마리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이 감각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디지?” 하고 묻는 순간의 공백과 닮아 있다.
익숙한 좌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숨 쉬는 육체만이 홀로 남는다.
자동차는 그 찰나를 연장해 놓은 기묘한 공간이다.

유리창 너머의 삶들은 빠르게 달아나는데,
나는 왜 낡은 소매 끝에 고이는 적막을 버리지 못하고 멈춰 서 있는가.

엔진의 굉음은 멀어지며 나를 비웃고,
길 위에는 타이어 자국 대신 해진 그림자만이 늘어진다.
쫓아갈수록 가벼워지는 나의 몸뚱이는
저 기린의 긴 목처럼
현실의 지평선에서 너무 멀리 뻗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열여덟의 서툰 고백’은
이미 무게를 잃었다.
무게를 잃은 것들은 공중에 떠다니며 기묘한 무늬를 만든다.

언덕 아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면,
달아난 창문들이 남기고 간 적막만이
차가운 비처럼 어깨에 내려앉는다.

나는 좁은 운전석에 앉아
방금 내 안에서 태어난
이 낯선 기린의 눈망울을 바라본다.

지구의 언어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오직 나라는 단절된 공간에서만 숨 쉬는 감각.

어제의 이름들을 지워낸 자만이 마주하는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고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