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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씨 May 15. 2020

동물병원 커피타임

슬프게 침착하기

“미카 검사할 동안 내가 가지는 커피타임이야. 크크.”


맥심 화이트모카 커피분말이 담겨있는 종이컵을 들고 오른손으로 저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24시 폴 동물병원에 진료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보호자들을 위해 마련되어있는 정수기 옆 커피다. 우리 집 강아지 미카가 검진받는 날 중 처음으로 내가 시간이 맞아 엄마를 따라 같이 갔던 날.

커피타임을 소개해주던 엄마는 해맑지만 슬프게 침착했다.

미카와 엄마는 작년 오 월부터 매달 이 동물병원을 찾는다.


*

작년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던 어느 , 미카 산책  기절했다.

팔다리를 옆으로 하고 몸은 추욱 늘어져 의식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힘도 없이 오빠의 두 팔에 안겨 동물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미카는 곧바로 깨어났고, 본인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듯 쌩쌩한 모습으로 가족 모두를 안심시켰다.


한 달이 흘렀고, 미카는 다시 한번 기절했다.

"심장 비대증입니다."
 처음으로 해본 심장 초음파 결과였다.


수의사 선생님은 미니어처 슈나우저 같이 흥분을 잘하는 강아지들이 나이 들며 흔히 가지게 되는 심장병이라고 덧붙이며, 상냥하지만 기계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미카 심장이 커졌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기도를 누르고 있어요. 그래서 일시적으로 숨을 쉴 수 없어서 기절했을 거예요.” 앞으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이고, 되도록이면 흥분하지 않게 주의해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정확하지만 모호하게 답변했다. "나이가 들고 있고, 장기가 노화하고 있어서, 심장과 신장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는지에 따라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결정돼요. 돌연사할 수도 있지만, 건강한 아이는 약을 먹으며 육 년을 버티는 경우도 있어요”


언제 이별할지 모르는 채로 산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보이지 않는 죽음이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다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혈액 농도와 신장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매달 진행되는 피검사와 육 개월에 한 번씩 찾아오는 심장 초음파 검사를 한지도 벌써 일 년.


오늘 사 월 이십오 일, 벌써 세 번째 심장 초음파를 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사진과 숫자, 의료 용어가 섞여있는 자료를 친절하게 풀어 해석해 주시며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육 개월 전보다 심장의 역류가 더 심해져서 오늘부터 약을 늘려야 할 것 같다고.

노화가 진행되는 이상 상태가 계속 나빠질 텐데 약을 몸이 버텨줘야 살 수 있다고.


미카의 얼굴과 수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고 있는 미카를 지긋이 바라보며 오른쪽 귀로 들어오는 묵직한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는 그 순간, 세상을 강렬히 미워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다행이다. 덤덤한 척 선생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 미카를 데리고 엄마와 진료실에서 나왔다.


아, 안 좋은 소식은 매달 들으나 육 개월에 한 번씩 들으나 내성이 안 생긴다.

내 마음대로 미카는 육 년 더 살 수 있다고, 말도 안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강아지니까 스트레스 안 받아서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농담 삼아 말해왔는데.

분명히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았는데 육 개월 만에 이만큼 나빠졌다는 것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육 개월 후에는 과연 어떨까. 육 년의 시간을 바라보다 이젠 육 개월 앞을 보고 기도해야 한다니.


엄마와 나는 한동안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해진 마음을 추스르려 엄마에게 말했다.

“커피 마실래, 엄마?”

약을 기다리며 엄마와 가지는 커피타임이었다.

"육 개월은 살 수 있을까?"

최대한 덤덤하게,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물어보았다.

"그럼,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지. 미카 아직 건강하잖아."

엄마가 커피를 마시고 이어갔다.

"처음에 기절했을 때 바로 초음파를 찍었어야 했는데. 내가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뒤에 이어지는 말은 커피 마시는 소리로 대신되었다.


 약을 기다리며 슬프지만 침착하게,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다음 달도, 육 개월 후에도 이 자리에서 커피를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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