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작년 12월, 자취 7년 차. '자취(自炊)'라는 이름에 걸맞게 손수 밥을 지어먹기는커녕 거의 매일 외식으로 배를 채우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국을 끓이고 김밥을 싸던 시절은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하루, 이틀 사먹기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어 몇 년 동안 이어졌다. 햄버거, 피자, 돈가스 등 남이 만든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결국 바깥 음식에 지친 나는 손수 만든 집밥이 그리워 가끔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피로와 귀찮음이 요리에 대한 의지를 가뿐히 이겨버리곤 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직행하는 삶. 어쩌다 한번 식재료를 사놓고 얼마 안 가 냉장고를 음식물쓰레기 저장고로 만드는 삶. 위염과 식도염이 번갈아 찾아오는 삶.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한심한 나의 삶.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규칙적인 삶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소 구독 서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소를 구독한다니 이건 무얼까. 나는 '채소'라는 단어와 '구독'이라는 단어가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어플에 적힌 설명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채소 구독은 랜덤으로 7~8가지의 유기농 농산물을 정기배송받는 서비스였고, 배송 주기와 품목을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각각의 채소를 소량만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자 서너 알, 느타리버섯 한 줌, 부추 한 단 등 다 해서 만 오천 원 채우기,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 주에 배송되는 채소를 활용할 수 있는 레시피 페이퍼도 제공되었다. 바로 이거다! 다양한 채소를 조금씩만 받으면 같은 요리를 일주일 내내 먹지 않아도 되겠군. 레시피도 준다니 금상첨화였다. 나는 게으른 인생이 청산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3주 간격 정기배송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받아본 첫 채소박스에는 목이버섯, 유럽상추 등 평소에 사 먹기 어려운 재료들과 함께 익숙한 채소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레시피 페이퍼를 살펴보니 '홈메이드 짬뽕'이 눈길을 끌었다. 흔한 요리가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필요한 재료를 자세히 보니 집에 있는 재료만으로는 짬뽕을 만들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치킨스톡을 사면 유통기한 안에 다 먹을 수 있을까? 잠깐의 고민 후, 앞으로는 반드시 요리를 하리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마트에 가서 치킨스톡, 굴소스, 수제비 등 짬뽕에 필요한 재료를 사 왔다. 그리고는 손을 깨끗이 씻고 싱크대 앞에 섰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의 제대로 된 요리인가. 손에 땀이 삐질 났다. 비장한 순간이었다.
요리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먼저 야채를 손질했다. 오랜만에 차가운 물이 손에 닿는 감촉이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단단한 당근과 파릇파릇한 청경채, 까만 목이버섯을 깨끗이 씻으니 왠지 벌써 요리사라도 된 듯 어깨가 올라갔다. 마늘도 잘게 다지고, 팬에 기름을 두른 후 손질한 재료들을 넣고 볶기 시작했다. 마늘향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치익- 하며 야채들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요리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알맞게 익은 야채 위에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자 매콤하고 짭짤한 향이 코를 스쳤다. 그리고는 물을 붓고 굴소스와 치킨스톡, 소금과 후추를 넣어 팔팔 끓게 두었다. 그동안 나는 수제비를 익혀 그릇에 미리 담아두고, 간을 맞추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짬뽕 국물 맛을 보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악!"하고 정말로 소리를 질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 짬뽕 맛이 났다. 처음 해보는 음식이고 재료가 단순했기에 식당에서 먹는 '진짜 짬뽕' 맛이 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만든 요리에서 진짜 짬뽕 맛이 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수제비가 담긴 그릇에 국물을 부어 다급히 요리를 완성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방금 내가 먹은 맛있는 요리가 진짜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탁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그릇을 올리고, 바른 자세로 앉아 빨간 국물과 함께 수제비를 한 점 떠먹어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매콤 짭짤한 국물과 쫀득한 수제비가 만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꼬들꼬들한 목이버섯과 아삭하면서 시원한 청경채의 맛도 일품이었다. 불로 태운 적도 없는데 불맛이 났다. 이게 무슨 일일까? 치킨스톡의 위력인가? 나는 허겁지겁 그릇을 비웠다. 그건 내가 그토록 원했던, 건강한데 맛있기까지 한 저녁식사였다.
나는 내가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내게 충격을 준 '홈메이드 짬뽕' 이후 나는 시금치 프리타타, 청경채 덮밥, 상추 버섯 무침, 나물 파스타, 부추밥, 야채 고추기름면 등 레시피 페이퍼를 참고해 새로운 요리들에 도전하고 있다. 종종 실패할 때도 있지만 감자튀김이나 피자가 아닌 푸른 채소를 스스로 요리해 먹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맛은 좀 없어도 괜찮다.
가끔은 떡볶이집에 들러 저녁을 간편하게 해결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만, 냉장고에 쌓인 채소를 먹어치우기 위해 강제로 요리한다. 퇴근 후 바로 침대에 눕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채소들이 나를 활기찬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더 이상 죄책감도 들지 않고, 건강검진을 하면 빨간 글씨가 적힐 것 같다는 불안감도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조금 게으르고 무기력하지만 저녁시간만큼은 건강하고 규칙적인 사람이 된다. 아무리 귀찮아도 썩어가는 시금치를 처리하기 위해 요리를 해 먹는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오늘 저녁으로는 감자조림을 만들 것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손을 깨끗이 씻고 냉장고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