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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May 27. 2024

화분에서 정원으로

 "OO씨는 삶의 목표가 뭔가요?"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성격검사 결과지를 해석해주시면서 하신 질문이었다. 숫자가 빼곡한 내 검사 결과지를 훑어보니 '목적 의식' 점수가 현저히 낮은 것이 눈에 띄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대답했다. "교사가 되고 싶은 게 가장 큰 목표였는데, 그걸 이루고 나서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제가 뭘 위해 사는 지 잘 모르겠네요." 삶의 목표라니. 한 번도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질문은 그 날 이후 몇 주간 내 뒤를 따라다니며 일상생활 중에도 불쑥 불쑥 끼어들었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문득 떠올랐다. 난 뭘 위해 살고 있는거지?


 돈? 명예? 사랑? 내가 원하는 게 뭘까 고민하던 지난 주 토요일, 7번째 에세이 수업이 끝났다. 그 날은 수강생들끼리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늦은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재 선정의 어려움, 글 쓰는 데 걸리는 시간 등 각자의 고민과 에피소드들을 나누며 웃고 공감했다. 서로의 글을 칭찬하며 발전을 축하하기도 했다. 다른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시는지 궁금했던 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대화가 한참 흘러가던 중, 한 분께서 글쓰기를 하면서 생긴 변화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모두의 답변은 제각기 달랐다. 일상 속에서 지나쳤던 작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거나, 글쓰기를 계기로 나이와 직업 구분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 의미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글을 읽는 시각이 달라졌다거나 글을 쓰면서 감정이 해소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공감되는 이야기들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입에 연어 샐러드를 넣으며 내게 생긴 변화를 한 마디로 뭐라고 해야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일상을 유심히 보게 된 것, 뭘 쓸 지 생각하느라 7주 동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대화 주제가 바뀌었고, 그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잊혀진 채 곧 헤어질 시간이 되어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올라 햇빛을 받으며 차창 밖을 보던 중 문득 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글쓰기를 하면서 생긴 변화가 무엇이냐면요. ‘저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나는 두 달동안 토요일마다 늦잠 대신 신촌행 버스를 택했고, 귀찮아서 미루기만 했던 일상 기록을 7번이나 해냈다. 일기에 불과했던 내 글을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배웠다.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과 새로운 관점, 삶을 접하는 게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쓸 때는 가슴이 정말 뜨거워진다는 것도. 그리고 매주 수업이 끝난 후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때 느껴지는 행복감은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드라마보다 더 중독성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두 달 전보다 더 부지런하고, 글을 조금 더 잘 쓰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몇 가지 더 아는 사람이 되었다. 3월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씨앗을 심어두고 못 본 사이에 쑥 자란 강낭콩 줄기처럼, 나는 성장해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렇게 조금이라도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삶이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소하게는 설거지를 제때 하거나 운동을 꾸준히 할 때. 또는 에세이 쓰기나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처럼 무언가를 새롭게 배울 때. 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좋은 영화를 보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눈이 넓어질 때.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관점에 무릎을 탁 치게 될 때. 독서 모임에서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며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될 때. 인권과 차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더 낮은 곳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귀머거리가 된 것 같아."라고 말할 때 지적해주는 친구 덕분에 얼굴이 붉어질 때. 쓰레기를 덜 만들고 고기를 덜 먹을 때. 나는 깨달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저번 주보다 이번 주에 더, 작년보다 올 해 더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나를 만드는구나.


 이제는 상담 선생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강낭콩 정도가 심긴 작은 화분에 불과한 내 자신을, 멋진 정원으로 만드는 게 내 삶의 목표라고 말이다. 그 정원은 특별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식물들이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자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나는 씨앗들을 심고 매일 물을 주어 가꿀 것이다. 이들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다. 그 꽃에서 나는 향기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열매는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잡초가 자라거나 태풍이 불어서 애써 가꾼 작물들이 쓰러지는 날도 오겠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정원사가 되고 싶다. 그러면 90살 쯤 되었을 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되돌아보며 나 이정도면 잘 살았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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