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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17. 2023

아텔리세 이야기

동네 빵집

0.

 "헤이! 모처럼 봐서 반가워요!"

 "헤이! 아주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지냈어요? 바빴나보죠?"

 "네, 좀 바빴어요. "

 "아주 좋네요. 바쁜 건 감사한 일이죠."

 반 호흡 동안 지난 몇 주, 몇 달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

 "그러게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무엇을 담아줄까요? 아, 그리고 커피 한잔 줄까요?"

 "음, 오늘은 햄앤치즈 (Ham and cheese), 팡 오 쇼콜라 (Pain au chocolat), 그리고 말차 (Matcha)로 주세요. 커피는 괜찮아요, 자전거 타고 왔거든요."

 "알겠어요, 그럼 쿤-야만 (Kouign-amann) 하나 넣어줄게요."

 "매번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그 동안 뒷 손님들은 마카롱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어떤 게 가장 맛있나요?"

 새로운 직원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나는 쓸 데 없이 그러나 뿌듯해하며 오지랖을 부렸다.

 "패션프룻 (Passionfruit) 가나슈가 아주 기가 막혀요." 

 "오, 그럼 그거 두 개 주세요!"

 내 주문을 결제해주던 사장님은 직원에게 말했다. 

 "이 분께도 패션프룻 마카롱 하나 담아줄래요?"

 나는 고마움과 민망함에에 활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햄앤 치즈, 패션프룻 초콜렛, 말차, 쿤 야만, 마카롱

1. 

 이 세상 그 누가 바쁘지 않겠냐만, 나 또한 나대로 바빴던 것 같다. 두 번째 의사 라이센싱 시험을 위해 끝없이 지식을 머리에 우겨 넣고, 다행히도 무사히 통과한 뒤 드디어 의학대학원의 마지막 학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훨씬 더 큰 책임으로 다가왔다. 몇 달 연속 내원 병동(Wards), 중환자실(ICU), 심장계 중환자실(CCU) 을 돌며 새벽 네시 반부터 늦어지면 저녁 여덟시, 아홉시까지 환자를 돌보고 의학을 배웠다. 여덟, 아홉날 연속으로 일을 할 때도 있었고, 그래도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엔 조금이나마 잠을 조금 더 자거나, 다가올 레지던시(Residency, 전공의) 프로그램 지원을 위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머리터지는 준비를 했다. 정말로, 정말로 피곤했지만 환자를 돌볼 수 있어서, 그를 통해 더 내 지식을 쌓을 수 있어서, 또한 그를 통해 더 많은 환자들을 잘 돌보게 되어감에 감사했다. 내가 맡은 여러 환자들이 세상을 떠났고, 여러 환자들이 나에게 소리를 질렀으며, 여러 환자들이 치료를 거부하며 병원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 쓰라린 경험들도 켜켜이 쌓여 아마 내가 조금 더 숙련된 의사가 되도록 도와주고 있을 것이다.


2.

 빵과 케익을 정말 좋아하는 나는 어디에 가던 빵집이나 제과점을 찾곤 하는데, 정말이지, 미국에서 맛있는 케익을 찾는 것은 다시 말하건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봐 왔던 미국의 케익에선 두 부분이 눈에 띄였는데, 하나는 굉장히 자극적이라는 것, 그리고는 음식으로서의 가치보다 케익이 놓여질 상황에 관한 상징성에 더 큰 의미가 있어보인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클라이밍은 어린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포함된 액티비티로 제법 인기가 높다. 마치 어렸을 적 생일이면 동네 애들과 30분에 500원짜리 방방(트램폴린)에서 뛰어논 다음 피자나 치킨을 먹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 어릴 적 경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일하던 클라이밍 짐에서 세 시간짜리 클라이밍 생일 파티를 호스팅하려면 적어도 일, 이천 달러가 깨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파티에서 스파이더맨의 가족이라던지, 카다시안의 가족이라던지, 일하는 병원 교수님의 자제분들에게 클라이밍 하네스를 입히고, 떨어지면 달래주고, 다 끝나면 주스에 빨대를 꽂아주고, 피자를 한 조각씩 나눠주고 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의 연장선으로 코찔찔이들과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준 다음, 다양한 케익을 먹어볼 수 있었는데, 파티와 그 참가자들의 '지위'에 맞춰 케익들도 나름 이 주변 유명한 베이커리, 파티세리에서 주문 제작되어 오곤 했다. 이러한 케익들은 아주 화려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의 모양이라던지, 2단, 3단으로 쌓여 있다던지, 별의별 쨍한 색으로 뒤덮여 있다던지, 정말 독특하고 창의적인 형태를 띄고 있었다. 맛은 어떤가 하면 시트는 거친데다 어째서인지 짠 맛이 강하고, 뒤덮고 있는 버터크림과 아이싱은 마치 설탕 알갱이가 씹히는 것처럼 느껴질정도로 아찔하게 달며 느끼했다. 내가 아주 맛있어하는, 은은하게 상콤달콤한 크림과 가벼운 시트로 이루어진, 사실은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을 하며 맛도 못 느꼈으나 아마 굉장히 맛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어느 파티세리의 시트롱 케익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러한 케익들은 맛이 우선이라기보단, 생일 파티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아주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비교적 오래 실온에 두어져야 하니, 아주 두껍고 설탕이 많이 들어간 버터크림으로 무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다 아텔리세, 혹은 아텔리스 제과점(Artelice Patisserie)을 발견하게 된 것은 늘 그렇듯 내 취미 생활, 즉 구글 맵을 이용한 방구석 여행을 통해서였다. 아텔리세는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살짝 벗어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아주 작은 프렌치 파티세리였는데,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아주 예쁘고 아방가르드한 케익들의 사진 옆에 자세한 설명들이 인상깊었다. 예를 들자면, '소피아' 케익엔 '초콜렛 무스, 바닐라 크림 브륄레 인서트, 헤이즐넛 레이어, 럼에 절여진 체리 조각들'. 마치 파인 다이닝 코스의 메뉴를 보는 것 같았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찌나 달콤한지, 그 구성 요소들이 조합되었을 때 어떤 놀라운 경험을 얻게 될지 기대하게 만드는 메뉴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지나치면서도 쉽게 아텔리세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가격 때문이었다. 고작 손바닥만한, 한 5분 정도면 사라질 케익 하나에 자그마치 7달러라니, 보통내기의 사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케익이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어,' 라고 여우가 바라본 포도같은 옹졸한 생각을 하면서도, 종종 인스타그램을 염탐하며 궁금함만 쌓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주 그럴듯한 명분과 구실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바로 아내와 내가 만난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0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하면 -- 특히나, 우리의 생일을 2월 29일로 규정하기로 하고, 그 특정한 날짜가 실재해야만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아주 신박하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협의와 현대 의학에 기반하여 대략 400년 정도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 그렇게 긴 것 같지도 않지만, 10진법의 세상에서 10과 그의 배수들은 통념적으로 기념비적으로 여겨지기에 ...... 


 말이 너무 길었다. 정치를 해도 될 것 같다. 우린 그저 아텔리세의 케익이 먹고 싶었다.

'소피아'. 초콜렛 무스, 바닐라 크림 브륄레 인서트, 헤이즐넛 레이어, 럼에 절여진 체리 조각들

 이것이 바로 처음 먹게된 아텔리세의 케익, '소피아'였다. 설명 그대로, 아주 진하고 달콤씁쓸한 다크 초콜렛 글라사쥬 레이어, 정말 가볍게 흩어지는 초코 무스, 고소하게 바스러지는 헤이즐넛 향의 쌀튀밥, 군데군데 씹히는 쫀쫀한 체리 조각들. 'x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어'라는 나의 신포도적 사고가 다시 한 번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주는 순간이었다. 이 다음엔 또 무슨 그런 것이 있을까. 애를 키우는게 뭐 그렇게 좋겠어, 라고 생각하는 요즘, 과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아텔리세의 케익은 이렇게 맛있고 창의적이며 아름다울수가 있나 싶었다. 7달러 정도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음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적당한 구실을 찾을 때마다 아텔리세의 케익을 하나씩 다 먹어보기로 했다.


3.

 '끝'이라는 개념은 '시작'보다도 어려운 개념 같다. 아직 전혀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그것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면, 예컨데, '그건 원래 그렇지 않아?' 라고 아내가 물었을 때, '원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답하여 아내로 하여금 한숨을 푹 쉬게 만드는 방구석 철학자가 아닌,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자가 될 것이다. 


 나는 삶, 돈, 사랑, 건강, 고양이의 무한함을 갈구한다. 유한함이 불러오는 아름다움을 철학은, 예술은 노래한다. 그러나, 유한함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왜 인간은 사후 세계라던지, 신이라던지, 윤회라던지 등을 믿는 것일까. 나는 무한하게 요미와 시시콜콜 수다를 떨고, 무한하게 보리와 구름이와 투닥거리고 싶다. 374년 쯤 뒤에도 아침에 커피를 갈고, 저녁에는 설거지를 하고 싶다. 그런 별 것 없는 일상이 나에게 매우 아름답기에, 그것이 무한하게 이어진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별개로 특수함은 존재하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내 유전자의 텔로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에서 남은 날들은 분명 특수(unique)하다. 확실한 유한함과 끝이 존재하는 한정판 물건들의 값어치가 훨씬 높은 것과 같다. 나만 해도, 아텔리세에서 시즈널(seasonal) 케익을 출시한다 그러면 그 날만을 기다렸다 꼭 사러 가게 된다. 즉, 내 방구석적 '끝'은 그 끝의 매개체에 대한 특별함, 그리고 그 특별함을 얻기 위한 긴급성을 부여하게 되는 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팔년간의 MD-PhD 과정의 칠과 사분의 삼년을 끝낸 지금, 이후의 삶이 어디서 펼쳐질 지 알게 될 때까지 이제 딱 두 달이 남았다. LA에 남아있다면 좋겠으나, 어디 멀리 떨어진 촌구석으로 가게 될 수도 있는, 두근거리면서도 걱정스러운 시간이다. 그렇다면 아텔리세의 케익을 못 먹게 되겠지. 지금 내가 너무나 아끼는 이 생활에 끝이 있을 수 있음은, 즉 이 생활의 유한함은 아텔리세에 찾아갈, 아니, 찾아가야만 할 아주 특별한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쉬는 날 전날이면 나는 꼭 아텔리세, 혹은 아텔리스 제과점(Artelice Patisserie)에 들렀다. 사실 쉬는 날은 굉장히 유한하고 특별하긴 했다. 대충 아침 다섯시부터 저녁 여덟시, 때론 열시까지, 일주일에 한 번 쉴까 말까 하면서 병원 안에서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 아텔리세는 목요일부터 일요일, 열시 반부터 다섯 시 반까지밖에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적당히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U병원에 나갈 때는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C병원에 나갈 때엔 자동차 가속 페달을 (적당히)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크로와상이나 케익을 간신히 구하곤 했다.

간판도 없는 빵집
아텔리세의 케익들

 그러다보니 아텔리세의 사장님과 제법 친해졌다. 갈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주고 그간의 근황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텔리세는 사장님과 사장님 형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형은 베이킹을 총괄하고, 본인은 비지니스를 담당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그 당시만 해도 아텔리세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영업 시간이 마무리 될 무렵쯤 간신히 도착해도 케익이나 크로와상들이 진열대에 쌓여있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케익 두어 개를 사면 케익이나 빵, 마카롱 들을 몇 개씩 더 얹어주곤 했다. 찾아오는 거의 모든 손님들에게 뭐라도 하나씩 더 주는 모습을 보면 이 형제의 비지니스적 혹은 성격적 면모의 일부인 것 같기는 했지만, 이는 나로 하여금 아주 충성스러운 단골이 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인트 오노레 (Saint Honore), 파블로바 (Pavlova), 초콜렛 케익.

 이 '덤'들 덕분에 아텔리세의 케익을 다 먹어보는 데 사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 중 가장 놀라운 케익을 꼽자면 바로 세인트 오노레 (Saint Honore)와 파블로바 (Pavlova)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둘 다 아주 클래식한 프렌치 케익이었지만 아내와 나에겐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세인트 오노레는 역사적으로 베이커와 파티시에의 성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이 케익은 카라멜로 코팅한 슈 (choux), 패스츄리 크림, 그리고 생크림으로 조합되어 있었다. 그 맛, 향, 식감은 얼마나 다채로운지, 카라멜 코팅은 정말 바삭하고 슈는 폭신했으며, 크림은 달지 않음에도 바닐라향으로 가득했다. 만약 아텔리세에 단 한 번만 갈 수 있다면 여전히 나는 이 세인트 오노레를 먹을 것이다.

Pavlova

 그런가 하면 파블로바는 가벼움과 상큼함으로 가득한 케익이었다. 바닐라 머랭 베이스 위에 바닐라 무스, 패션프룻과 망고 필링, 코코넛 부스러기, 그리고 딸기와 망고 쿨리(Coulis). 우리는 처음 이것을 보고 빨간 쿨리가 마치 우메보시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가볍게 녹아버리는 머랭, 달콤한 패션프룻, 기쁘게 인상쓰게 되는 상큼한 쿨리, 이렇게 밝고 유쾌한 케익이 있을까 싶은 맛이었다.


4. 

 그렇게 아텔리세의 케익을 다 먹어보게 되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놀랍고 창의적이었으며 맛있었다. 그제서야 아텔리세의 크로와상이 궁금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크로와상이 맛있어봐야 .......' 그러나 그 때 나는 다시는, 다시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고 무엇에겐가 다짐했다. 팬케익, 리에쥬 와플, 프렌치 토스트, 소세지, 케익, 맥주, 와인, 곱창, 수육, 김치, 타코, 방어회, 라따뚜이 등등, 이런 헛소리를 한 대상이 너무 많아서 사실 이젠 부끄럽지도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아마 난 새로운 엄청난 식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세상은 아직도 작다.


 아니, 그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때까지 먹어보았던 크로와상은 어렸을 적 파리 바게트나 코스트코의 크로와상이 전부였다. 맛이 없지는 않지만 굳이 이렇게 아이커닉한 빵이 될 일인가, 싶은 맛이었다. 버터 맛이 많이 나는 빵이라면 브리오슈나 심지어 '모닝빵' 정도로도 충분할 일이었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 유명해져 먹어본 크로와상은 그 안에 크림이라던지, 초콜렛 시럽이라던지, 과일이라던지, 슈가 파우더라던지, 한 때 유행했던 '뚱카롱'마냥 그 빵의 본질적인 부분을 담기보단 부가적인 많은 재료들을 더해 가치를 증명하려는,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엔 적격이나 진정한 식경험에 있어서는 의문스러운 형태를 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본질이 뭔데, 라고 묻는다면 아직 고민중이다. 정말 괴롭게 고민을 해 보았으나 잘 모르겠어서 그제서야 '철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철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 혹은 적어도 나의 진심, 자아, 이성을 담은 일인지, 혹은 얼마나 허세, 가벼움, 허상을 담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형이상학에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의 본질적 개체(particular)와 성질(property)에 대해 끝없는 역사적 논의, 탐구가 이루어져왔다고 했다.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바로 대학이라던지 대학원이라던지 취업이라던지의 원서(application)다. 예를 들면, 무슨 전공을 했고, 학점은 어떻고, 어떤 봉사활동을 하였고, 어떤 자격증을 땄고 등등, 이러한 '성질'로 지원자들은 평가된다. 그 이외의 본질적 개체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성질만으로 그 개체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에겐 이것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본질적 개체가 진심으로 추구하는 의지로서 그 성질을 얻은 이들과, 그 성질을 얻었기 때문에 그 본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본질적으로 탐구심이 강하고, 무엇인가의 원리를 알고 싶어하고,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싶은 사람은 과학자나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자나 의사가 멋진 -- 사회적인 입지가 높고, 돈을 많이 버는 -- 일임을 알기에 -- 물론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 본질적인 의지가 없음에도 그것이 되기 위해 좋은 성적을 얻고, 봉사활동을 하고, 연구활동, 즉 성질적인 것만 추구한 인간이 과연 진정한 과학자나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민한다. '뚱카롱' 같은 존재이나, 조금이라도 더 본질적인 마카롱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위선적인 존재이나,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허상을 좇지도 않고, 위선적이지도 않다. 그는 윤리적인 가치관이 확실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구에 정직하며, 허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누군가가 그의 노고와 업적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본질적으로 즐겁기에, 열정과 시간을 들인다. 나는 그런 아내를 아주 아름답다고 여긴다.


 누군가는 자신의 배우자를, 결혼 상대를, 특정한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선택한다. 그것에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란 것은 분명 사회적 규범이며, 어떠한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두려워했다. 철 없는 나는 '본질'적 사랑의 결과가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나, 사실 이는 매체적, 예술적 환상이며, 현실은 결혼 중개 업체가 상징하듯, 지위와 역할, '성질'의 결합적 행위의 스펙트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혹은, 역으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랑, '본질' 을 통해 결혼을 하게 되며, 일부만이 '성질' -- 직업, 연봉, 부모님 직업, 연봉 등 -- 을 맞춰가며 사회적, 법적 관계를 맞춰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과연 '본질'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주 또한 복잡한 문제다.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그 객체에서 나온다고 미학은 이야기한다. 내가 추구하는 그 객체의 '역할'이라던지, '이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하는 개체에서 아름답다고 여길만한, 객관적인 가치가 존재하기에 나는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랑'은 일단 차치하고, 그렇다면, '결혼'에 있어서 이상적 역할을 이미 정의한 뒤 그 안에 사람을 문항 a부터 z까지 점수를 매긴 후, 이 사람이 가장 부합하다, 라고 결정을 하는 행위는 과연 아름다운 일일까? 더 본질적으로, 결혼은 아름다워야만 할까? 단순한 사회적 결속이 아닐까? 내가 이런 의문을 띄우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닌, 내 자신이 진심으로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내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던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까지 결혼이란 제도의 일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단순한 우연, 혹은 우주적, '신'적인 필연을 통해 그를 만났다. 풍파를 겪으면서도 나는 그와 같이 있고 싶었고, 결혼은 그 성질을 뒷받쳐줄 수 있는 제도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어떠한 역할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아름다웠고, 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기에 나는 그와 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는 내가 그와 함께 존재하는 이 공간에 온기와 편안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자처하였으나, 나는 본질적으로 그가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좋다. 의학을 추구하는 자로서는 그가 신체적인 아픔 때문에 그의 자유를 뺏기지 않게 그를 잘 관찰하고, 아픔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지 조언을 해주는 그 역할이 나는 좋다.


 물론,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이미 그의 역할을 규정했던 것일지도, 그리고 그가 그 역할을 잘 해낼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 알뜰하고, 손이 야무지며, 나를 아껴준다. 순수 예술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부분을 발라내어 제거하려고 했다. 열 개의 잘 익은 복숭아 중에서 굳이 그 한 개체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근대 건축학에서 설리번(Sullivan)은 그 유명한, 내 연구들이 근본을 둔, 'Form follows function', 즉 형태, 그리고 아름다움은 기능에서 나온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역할 중심, 즉 형이상항적 '성질' 중심의 결혼 상대를 꼽는 것과, 그 특수한 개체와 함께하고 싶음, 즉 형이상항적 '본질적 개체' 중심의 결혼 상대를 꼽는 것,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왜냐하면, '옳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이며, 거짓이고,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본질적인 크로와상을 좋아한다. 내가 아주 기본적인 사워도우 빵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밀가루, 물, 효모, 소금, 고작 그것으로 정말 향긋하고 따뜻하며 맛있는 존재가 구워져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크로와상처럼 버터를 이용해서 빵을 굽는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이것은 비본질적인 행위라고 규탄을 했을지도 모른다. '맥주 순수령'을 주장했던 독일처럼 말이다. IPA를 좋아하는 나는 본질을 이미 잊었는지도 모른다.


5. 

 '아니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아마 아내가 내 앞에 있었다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크로와상. 


 크로와상을 정말 맛있게 먹어본 것은 몇년 전 퀘벡에서였다. 학회 일정 중 마지막 날, 아내에게 마카롱 선물을 사갈 겸 들른 작은 빵집에 들어가니 새하얀, 그러나 부럽게도 아주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할아버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크로와상과 커피를 앞에 두고 신문 자락을 넘기고 있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눈이 새파란 빵집 주인과 서로 죄송스러운 소통 끝에 나도 크로와상 한 조각과 커피를 손에 들 수 있었다. 바삭함, 공기로움, 뜨거움, 버터리함, 여유, 그리고 다크 로스트 커피, 그것이 나에겐 크로와상의 본질같은 것이었다.

 

 아텔리세의 케익들을 다 먹어볼 무렵, 아텔리세도 아주 큰 도전을 했다. 두번째 매장을 연 것이었다. 그 즈음, 마치 근처 클라이밍 짐에서 운동도 열심히 했겠다, 안 먹어본 아텔리세의 크로와상을 먹어보기로 했다. '크로와상이 맛있어봐야......' 그리고 우리는 크로와상이 이렇게나 놀랍도록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ersian Princess (페르시안 프린세스)

 생각해보니 사장님은 이란 사람이었다. 페르시안 파티쉐가 굽는 프렌치 빵에 대해 글을 남기는 한국인이라니, 재밌는 일이다. 오렌지 꽃, 장미잎, 피스타치오 마지판이 담긴 시그니쳐 크로와상. 바삭거리는 식감, 정말 고소한 버터향, 어느 봄날의 꽃향기, 피스타치오의 고소함.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맛인지, 이것은 본질적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은 나의 감상이 아닌, 즉 철학적 미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듯, 진정한 아름다움은 개인의 감상이 아닌, 그 객체의 본질과 성질을 분석하였을 때 얻어낼 수 있는 객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1. 아름다움은 즐거움을 이끌어낸다. 
2. 아름다움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3. 아름다움은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관한 중요한 관용어(Platitude)중 여럿이 충족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쉬는 날이면 크로와상을 사러 갔다. 

 정말 결이 아름답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햄앤 치즈 크로와상.

 가끔씩 판매되는 망고, 패션프룻 크러플 (Croffle). 크로와상/와플 도우 속 가득 담긴 망고 퓨레. 

 이상하게 맛있는, 김 맛 나는 말차와 말차 초콜렛이 들어간 크로와상. 이렇게나 결이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내가 사랑하는 로컬 커피 로스터리, Alana's Coffee의 커피와 함께하는 티/커피세트.

 프랑스 브리타니(Brittany) 지역에서 유래했다는 Kouign-amann. 카라멜라이징과 넛의 조화가 훌륭하다.

 초콜렛, 헤이즐넛, 패션프룻과 초콜렛, 애플.

 햄앤 치즈, 로즈마리앤 올리브, 파와 파마산 치즈.

 초콜렛, 버섯, 장미와 라스베리 마카롱.

아내가 만든 티 세트.

5.

 그래, 때가 되었다. 2022년 말, 아텔리세가 캘리포니아의 최고 크로와상 집으로 선택되었다. 덕질하는 모든 이의 마음처럼 이렇게 되길 바랐으며,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캘리포니아의 최고? 과연 미국의 최고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자긍심도 들었다.


 그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마침 크리스마스와 새해 시즌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점점 더 아텔리세를 찾기 시작했다. 닫기 한 30분 전, 다섯시에 도착하면 빵이고 케익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전 날, 그리고 새해 전 날 찾아가니 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기쁘면서도 착잡한 마음이었다. 무차별하게 사람들이 크로와상을 네 다섯 상자씩 사가곤 했다. '홍대병'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네가 우리 형/오빠의 예술적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잔뜩 사가가지고?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집중해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수 있는데? 뭐, 길에서 비를 맞으면서 이걸 먹는다고? 그렇게 먹는 게 아닌데?


 꼰대가 따로 없다.

 크리스마스 한정 케익들. 말차 글라사쥬, 바닐라 무스, 패션프룻, 살구, 코코넛. 초콜렛, 헤이즐넛.

 12월 31일의 몽블랑. 처음으로 먹어보는 몽블랑이었다. 한국에선 몽블랑이 잘 해봐야 바밤바 맛이 난다고 해서 걱정했으나, 한 입 먹는 순간 너무나 새로운 맛에 또다시 웃었다. 정말 고소한 밤 맛에 바닐라 빈 향이 가득했다. 


6. 

 아텔리세는 아직도 바쁘다. 어제 닫기 30분 전 찾아갔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연 지 두 시간도 안 되어서 다 팔렸단다. 돈을 내려고 해도 낼 수가 없었다. 직원이 너무 미안해함에 내가 괜히 미안해졌다. 사장님은 주방 구석에서 너무 힘든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를 든 순간 눈이 마주쳤다. 


 '오 헤이! 반가워요!' 그가 말했다. 

 '아이구, 너무 피곤해보여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요즘 빵이 없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응당 이렇게 될거라 생각했고, 괜히 내가 자랑스러요.'

 '고마워요, 잠깐만 기다려요 뭐라도 줄게요.'


 그는 조그마한 파이, 'Galette des rois' 혹은 'King's cake' 한 조각을 정성스럽게도 담아주었다. 겹겹이 쌓인 패스츄리 도우 안에 달콤한 아몬드 프랜지팬(frangipane)이 가득이도 담겼다.


 한가하고, 빵 한 개 사면 두 개 얹어주던 그 한가한 때가 그립지만, 이렇게 맛있고, 친절한, 즉 아름다운 파티세리가 잘 되는 것은, 그리고 이 곳을 오랫동안 알아왔음은 굉장히 뿌듯하다. 나는 그렇기에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텔리세는 나에게 있어 아주 작고, 소중하며 자랑스런 동네 빵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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