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것이 바로 "아메리카의 맛"이란 것이다.
'내일 뭐가 먹고 싶을 것 같아?'
아내가 물었다.
내일 볼 시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차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미묘한 메뉴를 제안하고야 말았다.
'감자 튀김...?'
'음... 그럼 버거랑 같이 먹을까?'
'오!! 완전 좋지!'
늘 그렇듯 그는 내 머리 위에 커다란 느낌표가 떠오르게 해 주었다. 버거에 감자튀김이라니! 해야 할 공부에는 당연히 끝이 없고, 시간은 턱도 없이 모자라지만,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내가 가장 헷갈려하는 자가면역질환들에 대한 공부에 임하기로 했다. 왜냐면 내일은 다 끝나고 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을 수 있을테니까.
길다면 길지만 사실 순식간에 지나간 지난 두 달이었다. 다섯시 사십 삼분에 울리는 알람에 잠에서 깨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탁상 위에는 아내가 따라 놓은 물 한 컵이 담겨 있었다. 꿀꺽꿀꺽 목을 축이고 나면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 부엌으로 향했다. 매일같이 전자렌지 안에는 이미 죽 -- 소고기죽, 계란죽, 야채죽 등 -- 한 그릇이 담겨 있었고, 타이머는 44초에 맞춰져 있었다. 나는 'Start'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올리고, 마저 세수를 하고, 그 사이에 맛있고 포근하게 뎁혀진 죽에 감사하며 5분만에 먹어 치운 후, 여섯 시가 조금 넘어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의 시간은 참 빨라서,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도 정신을 차려 보면 저녁 일곱시, 여덟시, 아홉시가 되어 있었다. 다시 어두운 시간에 집에 돌아오고 나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야만 했고, 잠을 자야 함과 공부를 해야 함 사이에서 조급한 마음으로 애꿎게 시계만 몇 번을 흘켜보다, 결국 침대에 몸을 뉘이면 나는 몇 초 안에 정신을 잃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두 달이 갔다.
내과 로테이션이 시작된 일월, 여섯 시라는 시간은 아직 겨울 그 자체였다. (캘리포니아 기준으로) 춥고, 어두웠다. 졸리고, 춥고, 피곤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교차로 빨간불에 서 무료한 왼쪽 깜박이의 딸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반대 차선 버스에서, 그 어둠 속에서 열댓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내렸다. 그들은 후드를 꽁꽁 싸매고 주머니에 양손을 푹 넣은 채 새하얀 김을 내뿜으며 전철로 갈아타기 위해 잔뜩 움츠리고 걸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내가 얼마나 감사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나 또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되새겼다. 하루, 하루가 지나며 해는 조금씩 일찍 떠오르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새벽빛이 점차 나를 반겨주었다. 그렇게 내과 로테이션을 마무리짓게 될 무렵엔, 포근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새벽 공기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며 잔잔히 퍼뜨리는 달콤한 향기들이 가득해, 나에게 커다란 힘과 따스함을 가져다 주었다. 내과 로테이션을 돌며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배웠고, 환자들의 상태가 나아질 때면 희열을 느꼈으며, 돌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마음 속에 울음을 담기도 했다. 그 대단원이 끝나는 날, 아내는 나를 위해 흔쾌히 버거와 감자 튀김을 해 주기로 했다.
어릴적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삼촌, 고모 가족과 함께 모일 때면 정해진 행사로서 한 끼는 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명동에 나가, 명동 칼국수를 먹곤 했다.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국물에 매끄러운 면발, 그리고 정말 아리고 매운 겉절이. 그 북적거리고 소란스런 공간에서 후후 김을 불어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칼국수 값이 매년마다 비싸진다며, 역시 인플레이션이 큰일이라며 심오한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이 멋져 보였다. 나는 김치가 너무 매울 뿐이었다.
다른 한 끼 쯤은 꼭 햄버거를 먹었다. 삼촌은 '하디스'를 가장 좋아했고, 아빠는 '버거킹'을 가장 좋아해서, 적당히 번갈아 가면서 먹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하디스'의 '프리스코 버거'는 꽤 독특한 존재였다. 햄버거의 번 부분이 일반적인 동그란 빵이 아니라, 버터를 발라 지글지글 그릴에 구운, 토스팅 된 네모난 식빵 같은 빵이었다. 추억을 따라가 모처럼 이제서야 검색을 해 보니 심지어 익숙한 식빵도 아니고 사워도우 빵이란다. 나름 유니크한 부분이 있었을텐데 언젠가 한국에서 하디스는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후엔 가족이 모이면 아빠의 뜻에 따라 항상 '버거킹' 햄버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와퍼'를 먹게 되었다. 그 때엔 지금보다도 오이를 안 좋아했던 나는 늘 피클을 빼서 아빠나 엄마에게 주곤 했다. 어휴, 철 없던 놈. 아니, 아직도 음식에서 버섯을 골라내어 아내에게 주니 여전히 철 없는 놈 되겠다.
왜 하필 햄버거였을까. 이렇게 친척들이 모였을 때 피자나 치킨을 시켜 먹었던 기억도 있지만,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이 훨씬 많다. 아무런 근거 없는 추론을 해 보자면, 햄버거의 편리함과 개인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피자, 치킨은 한 판, 한 마리 단위로 시켜야 하기에 개인의 취향을 담아 주문을 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자면, 어른들은 다양한 토핑이 올라간 '슈퍼 수프림' 피자가 무난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나 동생은 피망, 버섯, 까만 올리브 등, 안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페퍼로니나 치즈 피자를 따로 시키기엔 양이 너무 많아, 어디엔가 타협점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의 연장선으로 피자나 치킨은 양을 맞추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물론 일인일닭, 일인한판 식으로 주문하면 아주 간편하겠지만, 나만 해도 어떤 때엔 두 조각, 어떤 때엔 다섯 조각씩 피자를 먹었기에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그 적당한 양을 유추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물론, 빨간 리본으로 묶여진 빳빳한 상자를 달랑달랑 들고 집에 돌아와 남은 피자를 냉동해둔 뒤, 며칠 후 신나게 크레이지 아케이드 게임을 마친 주말 늦은 오후 전자렌지에 돌려 먹을 때, 상자만큼 빳빳하게 질겨진 크러스트를 질겅질겅 씹어 먹는 즐거움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했지만 말이다.
반면 햄버거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음식이다. 나와 동생은 쥬니어 와퍼,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와퍼, 엄마는 새우버거, 삼촌은 와퍼에 패티 추가 등,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오롯이 주문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버거킹은 명동이나 나가야 존재했던 만큼, 돌아오는 길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꼭 안고 있는 커다란 버거킹 종이 봉투에는 우리 가족, 친척의 하나, 하나를 상징하는 햄버거 여덟 개, 열 개가 제각각 따스함을 품고 흔들거렸다. 한 사람에 햄버거 한 개씩, 그리고 감자튀김은 적당히 가운데다 다 부어놓고 먹고 있는 모습은 아마 '따로 또 같이'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햄버거 프랜차이즈들이 가장 성황했던 시적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또한 근거는 없는, 추억에 기반한 추론이다. 어느 백화점, 상가에 가도 1층에는 맥도날드, 롯데리아, 버거킹이 당연하게 존재했다. 백화점에서 자신의 관심있는 코트는 아이 쇼핑만 하곤 아빠의 옷이나 우리 형제의 장난감을 사고 나면 엄마는 우리를 햄버거 집에 데려가주곤 했다. 그 당시엔 나는 버거킹, 맥도날드보다도 롯데리아를 좋아했다. 역시 한국인이라면 간장 소스가 필요했는지, 나는 리브 샌드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라이스 버거가 출시되었을 때는 정말 '문화 컬쳐'였다. 그리고 한동안 롯데리아에 들리던 양념감자를 열심히 흔드는 소리도 말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반에 무언가를 '돌리는' 행위였다.
오래된 내 기억 속 한 놈이 반장 선거 공약을 제시했다.
'제가 5학년 3반 반장이 된다면 ... 모든 급식 우유를 초코나 딸기 우유로 바꾸겠습니다!'
상대 놈이 말했다.
'저는 모두에게 햄버거를 돌리겠습니다!!'
결과는 뻔했다.
격주로 '놀토'가 시행되었을 때, 혹은 중간 고사, 기말 고사가 끝난 날 반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종종 무언가를 돌리곤 했다. 그리고 시험 점수와 석차가 공개되었을 때 '반 1등'들은 반에 무언가를 돌리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자 기대, 규칙이었다.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노블리제 오블리쥬' 정신을 어릴때부터 기르려던 것일까, 사실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을까.
하여튼 그 당시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받던 햄버거가 정말 좋았다. 나흘에 거쳐 진행된 망할 놈의 시험, 1등부터 587등까지 점수에 따라 순서, 가치를 매기기 위한 숭고한 교육적 의식에 참가하며 느끼는 무거운 부담과 압력에서 해방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 햄버거를 두 손에 들고 학교에서 나와 친구들과 같이 PC방에 향하며 느끼던 자유로움과 기대감은 좀차 잊혀지질 않는다. 겜알못들이 모여 15분동안은 러시 금지, 한 40분쯤 있다 배틀크루져와 캐리어만 잔뜩 뽑아서 싸우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시절,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내 청소년기의 카타르시스적 순간들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시절, 집 앞 상가에 '크라제 버거'가 들어왔다. '수제버거'라는 타이틀을 달고 기본 8천원, 9천원쯤 하던 비싼 버거를 표방하던 프랜차이즈였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동네 아파트 단지 1동에 사는, 그 상가 건물주님이 들여왔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도 '1동'은 완전 부잣집, '3-5'동은 중산층, '7동'은 제법 부잣집, '9동'은 그저 그런집이라는 것을 -- 그리고 사실 1동 마저도 '강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명백히 계급이 존재함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길 하나 두고 급을 나누고 지랄을 한다는데, 사실 그것이 어디서 왔겠는가 싶다. 맛깔나게 계급을 나누는 것만큼 값싼 우월감, 그릇된 자존감을 효율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도구는 없다.
그 때까지만해도 버거는 맥도날드, 버거킹, 롯데리아 등 대형 프랜차이즈를 통해 유통되는 패스트푸드로, 간편하고 빠르며,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특별한 음식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크라제 버거는 그 시장에서 고급화를 표방하며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 적당히 포장 종이 비닐을 벗겨 한 입씩 베어 먹을 수 있는 버거가 아닌, 폭보다 높이가 훨씬 큰 버거였다. 옆으로 잘 뉘여 칼로 썰고 포크로 집어 먹거나, 정말 잘 꾹 손으로 눌러 조심, 조심 한 입씨 베어먹어야 하는 그런 버거였다. 얼마나 고급스런 '수제' 버거란 말인가. 되돌아 보았을 때 그래보았자 프랜차이즈 음식점인데 말이다.
어릴 적엔 '외식'과 '맛있고 특별한 음식'은 상동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잘 하는 사람들이기에 음식을 판매한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정말 음식에 대한 뜻과 조예가 깊어서 판매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한편으론 자본주의적 행위의 매개체로 '음식'이 선정되었을 뿐인 수많은 경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음식은 내게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내게 다가온다. 본사의 자본, 유통망, 조리법, 재료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은 세상 어디에 찾아가도 그 프랜차이즈라면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맛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여, 꾸준한 어느 정도의 마진을 남겨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가 세상 가장 맛있는 버거인가? 누구에겐 그럴 수도 있고 나에겐 그렇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 중 하나임엔 분명하다.
미국에서 햄버거를 비롯한 패스트푸드 혹은 냉동 음식은 고작해야 몇 달러, 정말 싸게는 99센트까지에도 사서 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하루 권장 열량, 권장 당분, 그리고 권장 염분의 제법 커다란 일부는 쉽게 채우다 못해 초과하게 되고, 이는 미국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거지같은 커다란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정말 무섭도록 망해 있기에 그들을 돌볼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아직 빙산의 일각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게 꼬여 있어 내가 과연 의사가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신선한 야채와 단백질이 들어간 건강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 증명되지 않은 내 개인적인 생각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선한 식품들은 그렇게 쉽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커다란 도시, 로스 엔젤레스 안에서도 싱싱한 야채, 과일이 유통되는 대형 마트가 몇 마일 동안 존재하지 않는 동네들이 있다. 차 타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생각보다 대중 교통 외에 운송 수단이 없거나 몸이 아픈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런 이유로 아파도 병원에 찾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산더미라 마음이 그저 먹먹하다. 그래, 동네 작은 마트에 방부제 잔뜩 들어간 공장빵, 쉬어가는 양상추, 그리고 상할랑 말랑 하는 고기 패티가 있다고 하자.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것들은 맥도날드 버거보다 비쌀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양상추와 고기 패티를 보관하고, 조리할 공간과 도구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가스/전자레인지나 냉장고는 기본 아이템이 아니다. 따로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따른 전기비는 또 별개다. 그럼 렌트비는 또 어떠한가? 정말 숨이 막히게 비싸다. 또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이 모든 비용을 책임지기 위해선 쉴 새 없이 일해야만 한다. 하루에 열 두시간씩 일하면서, 빵위에 갓 씻은 양상추를 올리고, 고기를 구워서 버거를 먹을 수 있을까? 하물며 물질적으로는 상대적으로 훨씬 충분한 전공의나 전문의들만 봐도 너무 바쁜 스케쥴 속에서 패스트 푸드로 매일 같이 끼니를 때우며 환자에겐 패스트 푸드를 먹지 말라고 조언해야 하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적당히 싸고, 적당히 편리하고, 적당히 먹을만한 음식들이 팔리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기에 팔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식재료의 가격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더 있다. 유통망이 좋은 이 곳에서 대형마트나 도매 센터에 찾아갈 수 있다는 가정 하에는 식재료 값이 무시무시하게 저렴하다는 것이다. 위에도 이야기했듯, 물론 그런 곳을 찾기 위해선 안정적인 운송 수단, 거주 환경, 냉장고나 조리 시설과 같은 인프라 스트럭쳐가 필요하다. 이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엔 코리아 타운의 마트만 찾아도, 할인하는 품목에 따라 양파가 5파운드에 99센트, 파가 열 단에 99센트 등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가끔 '파머스 마켓'에 찾아가면 농부들이 직접 기른 채소를 판다. 양파가 파운드에 1불, 2불은 기본이다. 대형 마트에 비해 적어도 5배인 것이다. 그것이 터무니 없는가 생각을 해 보면 사실 그것이 최소한의 적정 가격이다. 빵도 한 덩이에 10불, 진짜 말도 안 되게 비싼 것 같지만, 아내와 내가 야채를 기르고 빵을 구워 보았을 때 우리의 노력조차도 그 즈음은 될 것 같다. 즉,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형마트의 야채들이 이토록 저렴하게 팔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는 굉장히 손해를 보며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아마 말단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많은 부분들은 서류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undocumented) 이주 노동자들일테다.
방금 이야기했듯, 파머스 마켓의 채소들의 가격이야 말로 개인 농부들이 받아야 할 이상적인 가격이라고는 생각은 한다. 다만 나 또한 돈이 넉넉하지 않기에 안타깝게도 누군가 착취되어 99센트에 5파운드씩 판매될 수 있는 양파를 구매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자본가들의 배를 안타깝게도 불리고 있을 뿐이다. 파머스 마켓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 사회와 연계하여 취약층에게 다양한 바우처나 혜택들을 제공하고, '오가닉', '친환경' ,'로컬', '크래프트', '수제', '스몰 비지니스' 등의 이미지를 내세우며, 범세계적, 이윤추구적 기업이 아닌 지역적, 상생적 거래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크, '오가닉'이니 '친환경'이니 '수제'니 얼마나 맛깔나는 단어들인가. 기업들이 가만 둘 리가 없다. 아내가 집에서 20분 언저리쯤 바닷가 근처 휴양/관광 동네, 한국으로 따지자면 제주도나 양양 비스무리한 동네의 '비건 레스토랑'에 어쩌다 갈 일이 있었다. 비건 티라미수가 무려 10불 언저리였는데, 터무니없이 맛이 없다고 했다. 화가 난 그는 곧 같은 가격에 여덟 번을 먹을 수 있는 티라미수를 한 판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물론 자릿값이니 월세니 뭐니 당연히 가격에 포함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그런 보기 좋은 가치의 피상을 팔고, 그렇게 물가를 올리고, 돈 있는 자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월세를 더 올리고, 절망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순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아니, 과연 절망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회에 있어서 당연한 진화와 도태의 과정인 것일까.
아내와 함께 나누어본 얘기다.
'자본주의는 그래도 원래 같았으면 생존할 수 없던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지. 어떻게 한 사람이라도 살려서 거지같은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노예처럼 일해서 자본가의 배때기를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자본주의지.'
'그럼 어쩌지? 다 같이 농경사회에서 배고프게 살아가는 것이 나은 세상일까?'
'......'
'......'
이 길고 긴 불평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파는 음식이라고 맛있는 것은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아내의 음식은 아직 팔리지 않고 있다. 나는 이미 은퇴를 하고 싶은데 말이다.
https://brunch.co.kr/@bingsoo/77
그럼에도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레스토랑, 브루어리, 베이커리, 파티세리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전에도 글을 남긴 적이 있던 아폴로 버거는 아내와 나로 하여금 햄버거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여코 아내는 집에서 햄버거를 만들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아폴로 버거는 집에서 한 시간 반 쯤 떨어져 있어 자주 갈 수가 없었다. 두번째 이유론, COVID-19 상황 때문에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지면서, 예전엔 사용하던 브리오슈 버거 번이 안타깝게도 평범한 번으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마음을 먹었다. 번도, 패티도 처음부터 만들어 버거를 쌓기로.
고기를 간다. 차돌박이와 양지가 섞인 어마어마한 부위다. 아내가 고기를 직접 손질해 쓰기 시작한지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사실 버거 패티를 직접 만들 줄은 몰랐다.
https://brunch.co.kr/@bingsoo/93
번을 굽는다.
감자를 튀긴다.
멋진 브리오슈 번
패티를 굽는다.
재벌 튀기는 감자튀김.
홀 머스터드와 마요네즈
치즈와 함께 지글지글 구워지는 패티
뜨겁고 바삭하게 구워진 감자튀김. 브리스킷 (차돌박이/양지) 패티. 치즈, 토마토, 양상추.
햄버거가 이렇게나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용케도 형태를 유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게 입 안에서 부서지는 패티엔 굵은 입자로 갈아낸 차돌박이 고기의 쫄깃함과 지방의 아삭함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번의 표면은 바삭했으며, 속은 폭신하고 뜨거운 버터의 향으로 가득했다. 달콤하게 구워진 양파, 아삭한 양상추, 그리고 정말 바삭하고 뜨거운 감자 튀김.
브리스킷 패티, 구운 양파, 마늘칩, 트러플 버섯, 트러플 버섯 오일. 트러플 오일의 그 무지막지한 풍미와 폭신하게 튀겨진 알싸한 마늘의 향이 어마어마한 조화를 이루었다.
'햄버거'라는 단어는 독일 '함부르크 (Hamburg)'에서 미국에서 건너 온 이들이 개시한 음식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햄 + 버거로 구성된 합성어가 아니란 얘기다. 어릴적 나도 빵 사이에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라는 의미로 '햄버거'라는 단어가 파생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버거'라는 단어가 햄버거의 어근이자 대체적 용어로 사용되는 것 같다. 치즈버거, 치킨버거, 비건버거, 라이스버거 등등, 그래도 다행히 함부르크는 함부르크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다.
레몬 글레이즈 도넛 번을 이용한 버거. 아폴로 버거의 '루터 버거'를 오마쥬한 작품이다.
도넛 번에 버거라니, 아폴로 버거의 루터 버거를 먹었을 때에도 미친 조합이라 생각했지만, 아내의 도넛으로 포갠 버거를 먹으려니 더욱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달콤새콤한 레몬 향이 가득한 폭신한 도넛에 육즙 가득한 패티.
https://brunch.co.kr/@bingsoo/44
브리 치즈, 구운 할라뼤뇨, 양파와 토마토
집에서 버거를 만들어 먹게 되면서 가장 멋진 부분은 바로 자유로움이다. 원하는 야채, 원하는 치즈, 원하는 사이드, 원하는 매움, 원하는 짭짤함. 우리의 사고가 닿는 범위 안의 어떠한 맛도 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 같다.
여전히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그것의 커다란 부분은 자유 의지의 실현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기 시험 세 시간, 실기 시험 세 시간, 대충 마무리를 지었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아쉬웠다. 그렇게 내 온 마음과 노력을 담았던 내과 (Internal medicine) 두 달이었다. 후련했다. 잘 했는진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 한 것 만큼은 분명했다. 피곤하고, 달콤씁쓸하며, 자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중학교 언젠가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 날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이번 주말은 쉬고 놀 수 있구나. 이제 집에 아내와 같이 그간 못했던 수다를 떨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아침엔 느지막히 늦잠을 자고, 쉴 수가 있구나.
집에 가면, 그 맛있는 버거를 먹을 수가 있구나.
나는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해가 많이 길어져 노을이 눈부셨다. 그 저녁 공기는 봄을 맘껏 자랑하듯, 여전히 꽃향기로 가득했다. 아내가 평소보다도 조금 더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