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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r 01. 2021

소고기는 맛있고

오늘 하루도 즐겁다.

  02/26/2021 금요일, 날씨 아주 맑음.


 하루가 다르게 따스해지는 햇볕을 받으며 갓 내린 커피를 마셨다. 씁쓸하고 고소한 것이, 오늘도 맛있었다.


 클라이밍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브루어리에 들러 갓 캐닝(canning)한 TIPA (Triple India Pale Ale) 한 팩을 사 왔다. 아내는 어제 폭신하게 구워둔 식빵에 상큼한 아르굴라 샐러드, 그리고 보들보들한 반숙 계란 후라이를 곁들여 간식 겸 안주를 준비해 주었다. 10%가 넘는 알콜 함량이 무색하게 부드러우면서, 꽉 차있는 홉의 향이 짜릿했다. 맛있었다.

 아내가 자그마치 18lb짜리 브리스켓 덩어리를 손질했다. 이렇게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사 올 때마다 그의 기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늘 경이롭다. 영광스럽다.


 브리스켓 끄트머리에서 나오는 차돌박이는 정말로 별미다. 오랜만에 맛보는 소기름의 달콤함, 산미 있는 육향, 아삭한 하얀 지방, 이렇게 지글지글 구워진 로스구이는 입에서 녹아간다. 한가득 배가 부르다. 너무나 맛있었다.


 즐거운 하루였다.










 다시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클라이밍을 마치고 브루어리에서 맥주를 픽업한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닌데 구글 맵 경로가 새빨간 것을 보니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한지, 교통량도 다시 점차 늘어나고, 사고도 많아진다. 이런 405 고속도로의 평소 모습이 반가운지 반갑지 않은지, 마음이 복잡하다. 어쨌건 느릿느릿 기어가는 차에 앉아 봄과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뜨거운 햇빛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문득 며칠 전 브런치 메인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스치며 읽은 것 치고 왠지 자꾸 생각이 나는 글이었다. 대충, 브런치에는 음식에 관한 글이 아주 많은데 별 깊이가 없다는 글이었다. 글쓴이에 따르면 이는 본인의 삐딱한 관점이며, 취향일 뿐이라고. '깊이'가 글쓴이가 의도한 표현이 맞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시 읽어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 글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글쓴이의 말에 비춰 훑어본 나의 기록들에는 별 깊이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내와 같이 즐겁게,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해 일상의 기록을, 즉 일기를 남기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깊이 없는 글은 그럼 그냥 일기장이나 메모장에만 남겨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도 브런치가 '깊은' 글을 써야만 하는 플랫폼 또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느 공학 저널에, '차돌박이를 맛있게 구워 먹었다. 저자: 빙수'라는 논문을 게시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있어 브런치는 깔끔하게 글과 사진, 영상을 담을 수 있는, 이젠 제법 소중해진 일기장과 같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 '깊이'가 있는 글이라고 하면, 양자역학, 푸리에 변환, 위상수학, 미분기하학 정도로 충분하다. 그 깊이는 이미 충분히 깊어서, 그 심연은 어둡고, 외롭고, 경이롭고, 놀랍고, 경외감이 들고, 소름이 돋고, 힘들다. 그 외에도 나는 아내와 나름의 '깊이'가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미디어라던지, 돈이라던지, 자본주의라던지, 평등이라던지, 성이라던지, 환경이라던지, 죽음이라던지, 이런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딱히 그 끝에 별다른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해지거나 더 알 수 없게 되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우리는 조금 더 '깊이가 없는' 일에 집중한다.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말이다. 이 날은 나름 '깊이'가 있는 척을 하면서 벌어온 돈으로 사 온 브리스킷 고기 덩어리를 아내가 꽤나 깊은 내공으로 손질을 하여 구워 먹었다. 내가 하는 일에 '깊이'와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것은 관점과 포장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테다.

 아내가 손질을 마친 고기들이 영롱하다. 신선한 소고기 특유의 산미가 담긴 육향에 침이 고인다. 

 지방과 고기가 고루고루 섞인 차돌박이, 언제나 아름답다.

 맛깔나게 익은 김치, 갓 무친 시금치나물, 고추 향 가득한 된장국, 그리고 매콤한 야채 무침.

 노릇노릇 잘도 익어간다.

 기가 막히게 익은 김치와 윤기 흐르는 하얀 밥, 매콤하고 구수한 된장국, 뜨겁고 포슬포슬한 감자, 거기에 갓 손질해서 구워낸 보드랍고 기름진 차돌박이. 행복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차돌박이를 먹는 이 저녁 한 상이다.


 배가 한껏 부른 채로 나는 아내와 함께 마루에 널브러져 앉아있었다. 그의 머릿결을 느끼고, 좋은 냄새가 나는 보리를 쓰다듬고, 더 조그맣고 부드러운 구름이의 머리통을 훑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없는 일상이 사실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밤이었다. 나는 이렇게 깊이 없는 음식 글을 남기지만, 그 글쓴이는 오늘도 깊이 있는 음식 글을 읽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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