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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29. 2021

백신을 맞았다.

희망과 안도의 mRNA

 한참 길어진 미팅을 끝내고 나서도 졸업이라던지 진학이라던지, 나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한 그대로였다.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아슬아슬하게 예약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을 터였다. 아내의 자전거, '반달이'의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내 자전거를 훔쳐간 그놈 자식을 한 번 더 저주했다. 얼굴에 스치는 공기는 차갑고 바삭했으며,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예쁜 빛으로 물들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지만 이런 겨울의 분위기를, 그리고 그것을 느끼며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한다.


 한 사십 분쯤 달려 산타 모니카 병원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시간을 확인하니 예약 시간 3분 전이었다. 입구에는 COVID-19 백신을 접종하러 온 이들이 바닥에 붙어 있는 '6ft social distancing' 스티커에 맞춰 서서 한 명, 한 명 COVID-19 증상을 검문하는 것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거의 대부분이 접종 1차 대상인 65세 이상의 고위험군의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 아주 건강하고 비교적 젊은데도, 의료 기관에 속해 근무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 또한 우선적으로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예방 접종실에 들어서자 간이 부스가 여럿 서 있었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대부분인 만큼, 특히나 관절이 불편한 이들은 군데군데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주사 한 방 놓는 것 치고 한 사람당 제법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독감 주사처럼 일상적인 백신이 아닌 만큼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내 뒤로 오신 분은 체격은 거대하나 구부정한 자세로 가쁘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통로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줄을 관리하시던 분은 그분을 접종 대기실 안으로 불러, 의자에 앉아 기다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숨을 쉬는 게 힘들어 보인다며, 여기까지 예방 접종을 하러 와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따뜻한 말을 건네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본인이야말로 너무나 고맙다며, 이렇게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것만큼 고마운 것이 어디 있겠냐며 아주 활기차게 대답했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는데, 그 사이에 줄을 관리하던 담당자가 바뀌어, 앉아 있던 그분을 먼저 부스로 안내했다. 나야 딱히 바쁜 것도 아니고 급할 것도 없어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나를 가리키며 이 'gentleman'이 먼저 왔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고, 그는 아마 마스크 뒤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부스에 들어서니 가운데 손가락에 강낭콩만 한 다이몬드 반지를 낀 간호사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멜로디'는 정말로 느긋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백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래서 이렇게 한 명당 오래 걸리는 것이었구나. 멜로디는 아침 여덟 시부터 접종을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아침을 못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방에서 잠깐 도시락을 꺼내놓기만 하겠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심지어 지금 도시락을 먹어도 괜찮다고.


 그는 도시락 가방에서 그의 아침이자 점심을 꺼내었다. 맥주 한 캔도 안 될, 프로틴 쉐이크 한 병이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고 말을 건네었다. 그는 오늘 마침 본인의 두 번째 접종까지 마쳤다며, 이것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안도를 얻게 된 것처럼, 바쁘고 피곤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안도를 전해줄 수 있는 과정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주사를 맞게 되었다. 고작 5ml의 액체에 들어있는 백신. 고작 그 정도에 들어있는 mRNA가 결과적으로 내 몸속으로 하여금 COVID-19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내게 할 것이었다. 주사 바늘이 몸에 닿아 있던 것은 단 1초, 딱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15분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이들이 오가며 백신을 맞았다. 나처럼 젊은 직원들이 왔다 가고, 할머니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온 할아버지 부부가 사이좋게 같이 주사를 맞기도 했다. 접종 후 15분 정도 기다리는 많은 이들이 소소하게 수다를 떨고, 농담을 나누었다. 간호사 분들은 계속해서 너무나 친절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안내해 주었다. 공기에 따뜻한 웃음의 온도가 배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희망과 안도의 냄새구나.


 여전히 바이러스의 변종 등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아마도 이 백신 덕분에 인류는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졸업이건 뭐건, 나는 여전히 건강하고, 집에 돌아가면 귀엽게 맞아주는 보리 구름이가 있고, 예방 주사를 맞으면 특별히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며 감자튀김을 튀겨주겠다는 아내가 있다는 것에 안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나 불안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백신에 들어있는 mRNA는 우리 몸으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COVID-19 항원 (antigen)을 생산해 항체 (antibody)를 유도한다는 데 있어 과학적으로 아주 획기적이기도 하면서, 유례없이 전 세계적으로 일상을 무너뜨린 바이러스 -- 혹은 기관, 혹은 정부, 혹은 개인 -- 의 암담한 현실을 딛고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처럼 주사를 맞은 왼팔이 제법 뻐근하다. 그것이 제법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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