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수 Dec 07. 2020

파도의 기록

부질없이 밀려오는 소중한 흐름

San Onofre, 서퍼들의 성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다듬어져 왔을지 모를 보드랍고 둥그런 돌멩이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바닥 위로 맑고 투명한 파도가 스쳐 지나오며 느려지다 결국 '샤르륵' 소리와 함께 하얗게 부서졌다. 다시 밀려가는 바닷물이 모래 위에 남긴 파스칼의 삼각형과 닮은 패턴들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또 다른 파도가 부서지자 부드러운 하얀 거품이 내 발 끝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또 밀려갔다.


 저 멀리 San Onofre의 서퍼들은 보드 위에 앉아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파도를 하나씩 넘기며 좋은 파도를 찾고, 누군가는 파도를 잡아 물 위를 미끄러져가며, 가끔은 멋진 묘기를 부리며 보드 뒤로 새하얀 바닷 물방울들을 튀기기도 했다. 누군가는 파도를 잡으려다 고꾸라져 비취색 물속에서 굴렀다. 그리도 또다시 파도를 찾아 넘실거리는 바다 저 편에 시선을 두고 힘차게 패들링 해 나갔다.


 그 사이에도 파도는 서퍼들을 지나 내게 밀려와 마저 부서졌다. 계속해서 밀려와 부서지고, 밀려와 부서지고, 그럴 뿐이었다. 그렇게 파도는 나에게 '소멸'이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최종적 숙명을 끊임없이 각인시켜주었다. 마치 부서지기 위해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만 같은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면 공허감과 허무함,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잔잔하고 차분한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생일 파티를 할 때면 니체의 정신을 계승한 한 놈쯤은 니힐리즘 비트로 리믹스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어차피 죽을 거, 왜 태어났니 ♫' 

 틀린 말은 아닌 그 노래를 문득 속으로 되뇌며 파도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차피 계속 부서지기만 할 것, 파도는 왜 계속 밀려올까. 인간은 왜 하루하루 살아갈까.


 '왜'로 시작되는 질문의 대부분은 주로 사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하늘은 왜 파란가', 라는 질문은 사실 '어떻게 하늘이 파랗게 관찰되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이에 따르면 하늘은 빛의 산란 '때문에', 혹은 더 정확히는 빛의 산란이란 '원리로'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꼭 또 한 놈씩 그럼 '왜 빛은 산란하는가' 묻곤 했다. 물론 이것 또한 빛의 파장이 어쩌니, 매체의 경계면이 어쩌니, '왜'는 '어떻게'라는 원리로써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놈의 '왜'는 끝이 없었고, 결국 '어떻게'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예를 들면 '빛은 왜 파동과 입자로서 존재하는가, ' 혹은 '중력은 왜 존재하는가' 등, '어떻게'가 아닌 빛이나 중력에게 마치 본질적 자아가 있어 '왜' 그런 형태로 존재하는지의 질문을 하면 선생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왜' 그 녀석이 그런 질문을 했는가, 더 정확하게는'어떤 사고의 기저'를 가지고 그렇게 집요하게 질문을 했을까 묻는다면, 그 애에게 그런 본질적, 철학적 통찰을 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론 선생님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어그로를 끌고 싶은 것뿐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그 심리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더 깊이 파내려 가다 보면 결국 또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왜'의 질문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왜'라는 과하게 본질적인 질문은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다.

Venice

 또 저 바다 안 쪽, 서퍼 하나가 타이밍을 잘못 골랐다가 부서지는 파도 안에 휘말렸다. 그는 금방 다시 튀어나와 다시 다음 파도를 찾아 패들링을 했다. 끝없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뒤로 끝없이 새로운 깊고 푸른 너울거림이 밀려왔다. '어떻게'적으로 보았을 때 파도는 조류나 바람의 힘을 기저로 생기고, 흘러오고, 부서졌다가 또 생긴다. '왜' 그런지는 내가 파도와 바다의 자아와 깊은 본질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확실한 것은 파도나, 인간으로서 나의 삶이나, 그것들이 존재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 전날 오후, 나 또한 바다 위에 누워 내가 잡을 수 있는 파도를 찾고자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검푸른 너울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 바닥의 수많은 돌들 덕분인지 파도는 아주 느리게, 친절하게 일어나 주어 초짜인 나에게 생각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평소 아무 신호도 없이 갑자기 내 머리 천장 꼭대기까지 일어난 파도에 아무것도 못하고 잡아 먹히는 것이 일상인, 매끈한 모래 바닥을 가진 베니스 비치와는 전혀 달랐다. 저 멀리 고수들은 더 먼바다에서부터, 더 큰 파도를 잡아 수십 초를 바다 위에서 미끄러져갔다. 나도 몇 개의 파도는 10초가량 느긋하게 타며 튀는 파도 방울과, 스쳐가는 바람과, 몸에 느껴지는 움직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물론 훨씬 더 많은, 수십 개의 파도를 놓쳤지만, 내 뒤로 부서지는 파도들 대신 내 앞으로 다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이번엔 이렇게 저렇게 해서 꼭 파도를 잡아야지, '하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의욕은 의욕일 뿐, 특히나 초보자로서 탈 수 있는 파도의 개수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다. 파도에 휘말려 구르고, 힘세고 괴팍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넘어 다시 평온한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열 번 정도 반복하니 어깨에 불타는 감각과 함께 쥐가 나 보드 위에 미역 줄기처럼 흐느적거리며 누워있게 되었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바다 위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무슨 모험 영화에서 주인공을 지키려고 대신 얻어 맞고 눈을 감기 전 마지막 모습을 한 주인공 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파도를 잡아 타고 해안을 향해 미끄러져 나왔다.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푸른 바다 대신 부서진 하얀 파도가 완전 녹초가 된 나를 잘 밀어주었다. 


 '왜' 파도는 끝없이 밀려와 허무하게도 부서지는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글쎄, 그것은 평생 모를 일이다. 다만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가 있기에 누군가는 그것을 판때기를 이용해 가로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파도를 배우고 그 속에서 구르며 조금씩 타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는 것이다. 부서진 하얀 파도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에 보드에서 일어나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조금 먼바다, 부서질락 말락 하는 파도에서 잔뜩 구르며 내가 잡을 수 있는 파도의 타이밍을 익혔으며, 그 덕에 점차 가끔씩 파도를 잡아 파도 위에 서 있는 짜릿함을 느끼게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게 투영된 파도의, 본질적 의미가 아닌 실존적 가치란,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며 또 살아있는 희열을 느끼게 해 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그 수많은 파도들 중 내가 도전할 수 있는 파도는 극히 일부분이고, 나는 파도를 잡기 위해, 그 즐거움을 느끼게 위해 그저 지나가는 수많은 파도들 중 내 뒤의 파도 단 하나에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해 패들링을 하며 가치를 부여한다. 파도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하게도 그 자리에서 계속 일어나고 부서질 뿐이다. 지친 내가 집에 가 다시 푹 쉬고, 며칠 뒤 다시 찾아와도 계속 그렇게 치고 있을 뿐이다.

Surf Dog

 나에게 찾아오는 하루하루는 파도와 같다. 내 삶에 어떤 본질적 의미가 있는가 하면 전혀 모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매일 내게는 어림잡아 24시간의 시간이 주어지며, 거기에 어떤 실존적 가치를 부여하는지는 내 나름이다. 삶의 아주 작은 문제나 불화, 혹은 단순한 게으름으로부터 불안함과 걱정에 쉽게 붙들리는 나는, 무한한 파도 중 내게 주어지는 아주 극소수의 파도처럼, 무한한 시간의 존재 중 굉장히 유한하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요즘은 나의 시간을 소중한 것으로 채우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한다. 커피를 마시고, 아내와 놀고, 고양이와 투닥거리고, 바위를 오르고, 사진을 찍고, 맛있는 것을 먹고, 캠핑을 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것에 집중하여 채워나가는 일상은 제법이나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다가 가끔씩은, 지쳐서 보드 위에 늘어져 있듯, 그러려니 하면서 쉬기도 하는 것이다.


 San Onofre와 그 주변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핑 스폿이라고 한다.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한 시간 정도 운전해 가 하루 들렀다 간 우리와 다르게 그 동네 서퍼들은 정말 캐주얼하게 자전거에 보드를 싣고, 바다에 한두 시간 들렀다가 멋지게 서핑을 하고, 제 각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다섯, 여섯 살 아이부터 머리 하얀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서핑이 삶의, 일상의 일부인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나이 서른에 바다에 뛰어든 나로서는 평생 이 곳의 서퍼들의 반의 반도 좇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 부러움과 질투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런가 하면 나의 일상도 나의 일상대로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맛있는 것을 먹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보리와 구름이와 매일같이 부대끼고, 마찬가지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비슷한 가치관과 미학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어두움을 헤쳐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별도 보고, 캠핑도 하고, 바위도 오르고, 그런 소중한 취미는 덤이다. 마찬가지로 무한하게 다양하게 존재하나 그 누구에게나 유한하게만 주어지는 나와 아내의 삶의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채워가느냐에 따라 실존적 가치와 의미가 차곡차곡 쌓여 갈 테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