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수 Nov 06. 2020

일상의 기록

오늘도 찾아온 하루에 감사하며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3집 <3>중 첫 곡 <네가 없었다면>의 도입부, 그 중에서도 첫 소리, 기타 슬라이드가 '솔' 음에 닫자마자 정신이 들어, 재빠르게 머리 옆 아이패드의 홈 버튼을 누르고 마루로 나왔다. 아직 남아있는 무채색 어두움과 나날이 존재감을 키워 나가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쨍한 노란 빛줄기 사이로 하얀 먼지 부스러기가 소리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 <겨울 아침>이 잘 어울릴 아침 풍경이었다.


 그 먼지 부스러기의 최대주주인 보리와 구름이는 내게 맘마를 내놓으라고 '아욱!' '우-엉,' 하면서 성가시게 따라왔다. 그들이 누워 자고 있던 담요엔 움푹 파인 네 발자국과 따스함이 남아 있었다. 그 귀여움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가장 먼저 맘마 캔을 딴 다음에야 커피를 올리고,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쿠콰콰'하면서 올라오는 고소한 커피의 향은 언제나처럼 싱그러웠다.

 유난히 고소하고 맛있게 내려진 커피를 마시다 뉴스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복잡하고 싱숭생숭한 기분에 옆을 돌아보니, 그간 맘마를 다 먹은 보리구름은 조금씩 옮겨가는 빛살 안에 앉아 팔자 좋게도 바닥에 드러누워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아침 햇살에 보리구름의 털이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마주친 구름이는 꼬리를 물음표 모양으로 말고 도도하게  걸어오더니, '으에엥!' 하며 어리광을 부리다 내 무릎 위로 퐁 뛰어올라왔다. 그러곤 온몸을 딴딴하게 말고는 그릉그릉거렸다. 그 털뭉치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참 따뜻했다.


 그런 구름이가 또 난데없이 퐁 하고 뛰어내려간 것은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맘마를 준 적이 없다는 듯, 구름이는 아내를 쫓아가 또 '아욱!' 하며 맘마를 달라고 보채었다. 영악하고 영특한 내 새끼. 대신 아내는 우리의 맘마를 준비했다. 며칠 전 끓인 구수한 미역국에 밥을 말고, 옆엔 알차게 익어가는 배추 김치를 종지에 담아 곁들였다. 아직은 서늘한 주방, 모락모락 김이 나는 미역국밥은 따스하게 우리의 배와 마음을 채워 주었다. 햇살은 아름답지만 아직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잠이나 더 자면 좋겠는데 왜...' 하며 집을 나섰다.


 아무리 겨울이 다가온다고 해도 사실은 반팔 반바지 차림, 팔다리에 느껴지는 공기가 서늘해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요 며칠 중엔 반갑게도 따뜻했던 오늘, 공기엔 아직 남아있는 여름의 따뜻하고 건조한 미련의 냄새와 다가올 겨울의 촉촉하고 서늘한 차분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포포의 트렁크에 서프보드 두 장을 싣고 베니스 비치로 향했다. 오늘도 아내가 말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일주일 내내 운동 같은 것을 하게 될 줄이야... 클라이밍에 서핑에 어젠 또 클라이밍, 오늘은 서핑, 또 주말엔 클라이밍...' 거의 사 년 전, 아침 여덟 시에 결혼식 예약을 잡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조금 고민을 하다가 아내에게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었는데, 참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바다는 커녕 계곡이건, 수영장이건, 심지어는 샤워건, 찬물이 몸에 닿는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서핑하는 것도 한참 보기만 하다가 어쩌다 시도해본지 두어 달, 이젠 그가 갈 때는 물론이고 한 번쯤은 혼자 동이 트기도 전에 나에겐 얼음장같은 바닷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면서 신나하게 되었으니,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그런 둘이 아침 일찍 바다로 향하는 길, 아내가 물었다. 

 '남자가 위험한 짓 덜 하고, 술이나 담배 덜 하고 그러면 여자랑 평균 수명이 비슷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나는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과연 남자라는 족속이 위험한 짓 덜 하고, 술담배 덜 할 수 있을까? 서핑하는 놈들이랑 클라이밍 하는 놈들만 봐도... 그게 아니더라도 어찌보면 여자가 매달 생리 하면서 피곤하게 잃어버리는 시간 만큼 더 살라고 신이 나름대로 정해준 게 아닐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결혼의 최고 좋은 점이라고 새삼 생각했다.

 

 오늘은 모처럼 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이고, 공기도 따스했다. 그러나 서프보드를 들고 걸어가 하얗게 부서진 파도의 끄트머리에 발을 담그자 곧바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겨울이 오긴 오는 모양이었다. 허리 높이쯤까지 바닷물이 올라왔을 무렵, 보드 위에 엎드려 패들링을 시작했다. 손이 물에 잠길 때마다 그 차가움이 찌릿하게 전해졌다. 그에 반해 아직 뻑뻑한 어깨가 한 번씩 돌 때마다 열이 나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패들이 빨라질 수록 웻수트 안 몸은 따뜻해졌고, 겨울 바다의 차가움은 짜릿한 시원함으로, 바닷물방울로 손가락 끝에서 튕겨나가졌다. 여름이 지나가며 선선해지는 산 속, 차갑고 날카로운 바위를 손가락 끝으로 움켜 쥐었을 때 전완으로 흐르는 짜릿함과 비슷했다. 서러울 정도로 감사한,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감정 말이다.


 오늘의 바다는 정말 매끄러웠다. 적당히 구름에 가려진 햇살은 아름답게 바다를 반짝거리게, 그리고 한 편 그 속이 투명하게 보이게 해 주었다. 내 앞으로 파도가 일어설 때면, 청록색, 터키석색의 물의 벽 안 쪽으로 정어리 떼들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내 뒤로 무너지는 파도를 볼 때면, 파도의 채도가 한껏 높아졌다가 새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아직 완전 초심자로서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오늘의 파도는 참 단단하고 차분하여, 커다란 자비로움으로 나의 부족함과 실수도 감싸주어 내가 파도 위를 가로지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고작 1피트 남짓 위에서 보는 해안은 어찌나 더 작고 낮아보이는지, 그 파도 위를 매끄럽게 지나가는 일은 어찌나 그렇게도 짜릿한지, 내 주변으로 부숴지는 파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러다 지쳐 보드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데, 저 멀리 까맣게 돛 같은 세모들이 수면 위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언제 봐도 반가운 돌고래들이었다. 갑자기 신이 나서, 한참 바다 안쪽으로 패들링을 해 나아갔다. 비교적 깊은 바다, 표면으론 커다란 파도가 없는 평온한 바다에 앉아 있으려니 돌고래 무리들이 신이 난 듯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에는 유난히 작은 돌고래들도 보였다. 몸 길이도 짧고, 지느러미도 작았다. 아가 돌고래인가보다. 어쩜 그렇게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바다를 가로지르는지, 얼마나 멋지게 -- 어떤 연유로 --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지. 쪼끄마한 녀석들은 그래봤자 (그럴 리가 없지만) 보리구름이만해 보이는데, 어찌 저리 잘도 수영을 하는지. 자연에서 보는 거의 모든 생물에 대해 그렇기는 하지만, 돌고래 무리를 보면서 유난히 자연의 신비, 생명의 가치를 느끼곤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삶에 오늘도 감사할 뿐이었다. 내 위에 떠 있는 태양, 구름, 푸른 하늘, 내 밑으로 왔다갔다 하는 물고기들, 청록빛 바다, 울렁거리는 파도, 저 멀리 해변에 앉아 내 쪽을 보고 있는 나의 아내, 아마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우리 고양이, 보리와 구름이.

 집에 와선 마저 남은 미역국과 밥을 먹었다. 그리고 아내가 며칠 전 만든, 역대급의 티라미수를 같이 먹었다.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속담을 나는 '감 내놔라, 배 내놔라'로 알고 있었고, 아내는 인터넷 상에선 '감나라 배추나라'로 정말 웃기게 쓰인다는 이야기를 해 주어 한참을 웃었다. 티라미수를 먹다가 왜 '감'과 '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까먹은지 오래였다. 역시,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것은 꽤나 행복한 일이다.

 구름와 보리는 각자 폭신한 담요 위에서 잔다. 나는 할 일을 하다 글을 쓰고, 아내는 다시 서늘해진 저녁에 몽실몽실하게 옷을 입고 제 할 일을 한다. 저녁으로 먹은 아내의 순대와 만두의 향이 계속 맴돈다. 새 순대를 만들 때가 왔다. 내일은 조금 더 일을 하고, 돈을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우리의 '집'에 대해 꿈을 키우고, 보리와 구름이를 쓰다듬고, 파도를 더 잘 잡고, 더 어려운 바위를 오르고, 더 맛있는 빵을 만들고, 더 예쁜 아내의 요리 사진을 찍고, 또 멋진 곳에 가 캠핑을 하고, 더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더 예쁜 풀을 키우고, 또 건강하게, 꼭 안으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음에, 살아갈 이유와 의지가 있음에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포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