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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ug 31. 2020

포포 이야기

고생은 바스러져 이야기로 남는다.

 긴장 속 축축해진 핸들을 꼭 잡고,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달리느라 1분씩, 1분씩 뒤로 밀리는 도착 예정 시간에 초조해하며 운전을 한 지 두어 시간,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장엄하고 화려한 노을을 배경으로 비치는 LA 다운타운 높은 건물들의 실루엣에 순간 넋을 잃었다. 그것도 잠깐, 차는 미묘하게 흔들렸고 나는 다시 핸들을 부여잡고 속도를 조금 더 줄였다. 집까지는 11분,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옆에서 아직 잠들어 있거나, 잠들어 있으려고 노력을 하거나, 잠든 척을 하고 있는 듯하다.

 I-10이 복잡하게 합류하는 지점, 여기만 지나면 딱 9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럼 그렇지, 갑자기 오른쪽 뒷바퀴 쪽에서 '트드드득', 하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 울렁울렁 흔들렸다. 하필이면 갓길이 좁아지기 시작해서 부리나케 경고등을 켜고, 최대한 오른쪽으로 차를 붙였다. 갓길 표시 선이 간당간당하게 운전자석 사이드 미러에 걸쳐 있었다. 그 바쁜 인터체인지를 쌩쌩 달리는 차들로 인해 우리의 차는 계속 흔들거렸고, 운전자석 문을 여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반대편은 어떤가 하면, 하필 고가 도로 위라 낙하 방지턱이 높게 서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어보니 간신히 내 몸통 정도를 낼 수 있는 틈이 있었다. 아내를 잘 넘어 프리웨이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으로 5차선, 오른쪽으로는 합류하는 3차선, 그 한가운데 좁디좁은 고가도로 갓길에 우리의 '포포'가 힘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고가도로 아래로는 텐트를 쳐 놓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드리운 석양은 놀라울 정도로 멋졌다.

LA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

블랙 마운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크랙 (Crag, 클라이밍 장소) 블랙 마운틴에서 클라이밍을 하고, 캠프 사이트에 자리를 잡고, 아내와 함께 세상 맛있는 라면과 전을 먹은 후 달콤한 낮잠을 자고, 밤늦게 합류한 친구들과 신나게 족발과 전으로 야식 파티를 하고, 모처럼 시원함을 즐기며 깊은 잠을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누룽지에 스팸 야채 볶음을 먹은 후 둘째 날 클라이밍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따라 달리던 도중 계기판에 타이어 압력 경고등이 들어왔다. 아, 망했다.

 크랙 입구에 도착해서 바퀴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 뒷바퀴에 못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 바퀴에만 벌써 세 번째다. 같이 온 친구들은 물을 뿌려보며 상태를 봐주었고, 아마 집에 갈 때까지는 괜찮을 것이라고, 혹시 모르니 우리가 내려갈 때 같이 가 주겠다고 하였다. 당장 내려가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면 -- 본인들은 지난밤 열한 시에 도착하여 채 열두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클라이밍도 못 한 채임에도 --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은 같이 내려가 주겠다고 얘기하였다.

 나의 걱정 회로는 늘 그렇듯 신이 났다. '그래! 또 걱정할 일이 생겼네. 지금 집에 안 가면 너 큰일 나. 오프로드도 다 못 벗어나고 그 엄청 곡률이 큰 코너에서 하필이면 타이어가 터져서 굴러 떨어질걸? 지금 집에 가도 보리 구름이를 살아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클라이밍? 지금 당장 내려가야지! 그러다 굴러 떨어져야지!' 참나, 그 '똑똑'하다는 나의 뇌는 어찌나 이렇게나 멍청하게도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클라이밍을 할 것인가 하지 않고 당장 떠날 것인가.

 큼지막한 크래시 패드 두 개에 클라이밍 신발과 초크, 자그마치 15kg 정도의 짐을 메고 가쁘게 숨을 쉬며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차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 발, 한 발, 하필이면 주차한 장소에서 가장 먼 크랙 정상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세상 수만 가지 것들에 대해 나는 당장 그것에만 집중하지 않으면,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 그도 이제는 익히 알고 있지만 -- 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세상에 무너질지언정 나는 그 걱정을 미뤄보기로 했다고. 그는 답이 없었다. 어차피 이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내의 동의와 공감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그 말을 믿어야만 했다.

 그 뜨거운 햇빛 아래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차에 대한 걱정을 한 발짝씩 구긴 신문지처럼 꽁꽁 열심히 누르며 오른 산 정상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잃었다. 그러나 커다란 바위 뒤 그늘 아래 서서 멀리까지 펼쳐진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려니 서늘한 산바람이 나의 땀을 가져가고 상쾌한 솔 냄새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 올랐던, 운이 좋으면 정상 근처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친구들이었다. 그들도 길을 잃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합류할 수 있음에 반가워하며 같이 우리가 오르려던 바위를 찾았다.

 바위를 한참 바라보고 잡을 홀드들을 만져 보았다. 크게 뛰어 정확하게 홀드를 잡아 순전히 상체 힘으로만 붙들고 있어야 하는 어려워 보이는 동작이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나의 차 걱정을 내 사고의 변두리보다 아주 살짝 바깥으로 밀쳐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의 가장 큰 '걱정'은 그 동작을 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이 바위 위에 오를 수 있는지, 그뿐이었다. 첫 시도, 던진 몸은 지면으로 떨어지지 않고 날카로운 돌을 잘 잡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다음 동작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딱히 잡을 구석도 없고 햇빛에 잘도 구워져 손이 닿자마자 땀 때문에 매끈해질 바위의 윗면을 어찌어찌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올라야 했다.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뜨거운 바위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끌어올렸다.

 아내도 오르고 싶은 문제를 발견하여 손, 발가락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한동안 몸을 당겼다. 하루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햇볕이 그 바위를 따스하게 비출 때쯤, 아내가 나에게 스폿 (Spot, 클라이머가 크래시 패드 위로 안전하게 떨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서포트를 해 주는 일)을 봐 달라고 했다. 나는 스폿을 보며 큰 소리로 그를 응원했고, 그는 멋진 몸의 움직임으로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에서 내려온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확실히 내가 스폿을 보면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쑥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완전히 지쳐 클라이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퀴는 못이 박힌 채로 멀쩡했다. 뒤에서 따라와주는 친구 차량과 같이 울퉁불퉁 바위가 박힌 오프로드 산길을 40분쯤 식은땀을 흘리며 내려왔다. 포장된 도로로부터 핸드폰 서비스가 터질 때까지 30분이 지나자,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향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포포는 잘 버텨주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 9분 전, 우리는 익숙한 풍경, 아주 낯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짙은 노을, 점점 시원해지는 바람, 고가도로에서 계속 들려오는 음악 소리, 마리화나 냄새, 끝없이 지나가는 차들, 그 변두리에 비상등을 켜고 멈춰 있는 우리. 이 길을 얼마나 많이 달렸던가. 멈추어 있는 이 곳은 블랙을 갈 때건, 조슈아 트리를 갈 때건, 트램웨이에 갈 때건, LA Boulders 클라이밍 짐에 갈 때건, 한인 마트에 갈 때건, 차이나타운에 갈 때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익숙한 도로였다. 그것이 지금은 어찌나 비일상적이고,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일단 구멍이 난 타이어는 오른쪽 뒤편이었다. 만일 왼쪽, 즉 도로 쪽의 타이어였다면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할 꿈조차 꾸지도 못할 것이었다. 하필이면 점점 좁아지는 갓길에 차를 세우게 되었으나, 차 오른편과 낙하 방지턱 사이에 휠을 빼낼 수 있는 틈이 아주 간신히 남아 있었다. 몇 센티미터만 더 좁았으면 휠을 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쨌건 LA 다운타운 근처까지 왔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산길에서,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돈이야 많이 깨지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토잉을 해서 집에 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놈의 오른쪽 뒷바퀴에 못이나 날붙이가 박혀 바람이 빠지게 된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첫 번째에는 못이 단단하게 '잘' 박혀 공기가 급격히 빠지지 않아 그대로 타이어 센터에 가서 수리를 받았다. 두 번째에는 맨발로 밟았으면 발이 충분히 썰려나갔을 것 같은 커다란 칼날이 박혔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포포는 주차장까지 잘 버텨 주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처음으로 잭으로 차를 높이고, 바람 빠진 타이어를 빼 내고, 스페어로 교체를 해 보았다. 가능하다면 살면서 이런 일이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차를 몰다 보면 언젠가는 생길 일이기에, 이렇게 점차 포포를 관리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에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 좀 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기는 했지만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하는 것은 해 본 적이 있는 일,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구들과 스페어 타이어를 꺼냈다. 

 역시 세상은 마음 같지 않은 법이다. 잭으로 차를 들어 올리는 것부터 문제가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위식 잭 scissors jack)은 나사를 잠그면 높이가 높아지고, 풀면 낮아지는 구조였다. 차를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을 가하기 위해서는 손으로 돌리는 것은 턱도 없고, 나사 끝에 달려 있는 고리에 'ㄱ'과 'ㄴ'을 위아래로 붙여둔 테트리스 블럭 같은 단단한 막대를 걸어 회전축으로부터 레버 암을 길게 하여 토크를 키울 수 있었다. 가게나 캠핑카에 달려 있는 어닝(awning)을 피거나 접을 때, 회전축에 붙어 있는 나사 구멍에 긴 쇠막대기를 꽂아 낚싯줄 감듯이 빙글빙글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막대가 잭 나사의 회전축과 평행할 필요가 있었는데, 젠장, 휠이 나올 길이도 간당간당한 틈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막대를 회전축에 수직으로 걸고, 한쪽에서 밀어주면 반대쪽에선 당기고, 나사고리에서 막대를 빼서 반대쪽으로 건네 다시 고리에 걸고, 밀고, 당기고,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힘들게 잭을 높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조금씩 차를 들어 올렸다.

 폼 좀 잡자고, 점수 좀 따자고, 아내에게 안전하게 차 안에 있으라고 당당히 얘기는 했는데, 혼자 하고 있으려니 진척은 너무 더디고 땀은 끝없이 났다. 아내는 아마 처음부터 이리될 것을 알았겠지만, 문을 열고 나와 '같이 해, '라며 쿨하게 레버 막대를 잡았다. 아내는 저쪽에서 밀고, 나는 이쪽에서 당겼다. 고리에서 레버 막대를 빼 아내에게 건넸고 아내는 고리에 걸어서 다시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한 바퀴씩 레버 막대를 돌릴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의 옷들 중 하나인, 멋진 패턴이 놓아진 석류색 긴치마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 위에 그가 입은 깔끔한 까만 탱크탑, 그리고 그 뒤로 여전히 멋지게 펼쳐진 노을, 캠핑을 하며 묻은 먼지들, 이 도로변에서 묻은 먼지들, 이마에 맺힌 땀, 그런 그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예뻐 보였는지 모르겠다. 둘이서 말없이 레버를 돌리고 있으려니 왠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포포는 조금씩, 조금씩 들려졌다.

아내의 치마

 아내는 자신이 차를 드는 것을 마무리 할 테니 나는 그다음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나는 렌치를 꺼내 휠을 고정하는 너트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뻑뻑했지만 세게 힘을 주니 다섯 개 모두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다 됐다, '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을 놓아가며 별생각 없이 너트를 하나씩 완전히 풀었다. 네 개를 풀고 마지막 녀석을 돌리는데 미묘한 저항이 느껴졌다. 조금 더 힘을 줘 보았지만 렌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또 망했다. 너트와 볼트 나사산이 어긋난 (cross-threaded) 모양이었다. 그간 클라이밍 짐에서 루트 세팅을 하면서 이런 상황이 찾아오면 도저히 풀 수 없게 되어 볼트를 그라인더로 갈아낸 것이 몇 번인데, 그만큼 조심하여 렌치나 드릴을 정방향으로 잘 돌려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급박한 상황에서 섣불리 안도해버렸던 것이었다. 자책과 함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타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보험사나 견인 트럭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이제 거의 완연한 밤이 되었고, 나는 그저 허탈하기만 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스페어를 끼고 집에 가고 있었을 터였는데.


 갓길 옆 차선, 그렇게나 쌩쌩 달리던 차들이 왠지 느려지다 못해 줄줄이 멈추더니, 일부는 창문을 열어 나에게 쌍욕을 하며 차선을 바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살짝 앞쪽에 큰 견인 트럭이 비상등을 켜고 멈추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여전히 운전자석 쪽으론 지나갈 수 없어 포포를 짚고, 추락 방지턱 위를 잘 걸어 그 트럭을 향해 뛰어갔다. 클라이밍을 하며 생활 속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에 부담이 줄어든 것만큼은 참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그 트럭은 후진을 하기 시작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와, 포포의 왼쪽 뒤편으로 갓길과 갓길 옆 차선을 막아 주었다. 알고 보니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AAA (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 트럭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아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AAA 멤버십이 있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타이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기름이 다 떨어졌을 때, 혹은 어떤 이유로던 도로에 갇혔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멤버십 등록을 할까 늘 고민을 하다 비용이 아까워서 하지 않았는데, 마침 하필이면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었다.

 그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AAA 멤버십이 없는 차량이긴 한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도와주어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또한 경찰에게도 전화를 하여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그러곤 트럭에서 내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마스크까지 끼곤 너트를 살펴보아 주었다. 그의 작업복 가슴팍을 보니 'Oscar'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는 커다란 쇠파이프를 꺼내어 내가 갖고 있는 렌치 끝에 껴 다시 너트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곧 땀이 잔뜩 흐르기 시작했고, 몇 분 후 결국 너트는 볼트의 일부와 함께 잘려 나왔다. 어찌나 커다란 토크가 걸렸는지, 잘려 나온 쇠붙이가 너무나 뜨거웠다.

 그 이후로 그는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하여 주었고, 나는 그를 도와 다시 너트를 끼워 넣었다. 그의 전동 임팩트 드라이버로는 순식간이었다. 부러진 너트와 볼트는 쉽게 교체가 가능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이제 잭을 다시 내리기만 하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덩치가 커다랗던 그는 그 좁은 틈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면서 내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힘껏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다시 레버 막대를 밀고 당기며 조금씩 차를 내렸다. 오스카는 그 사이에 스페어 타이어를 꺼내느라 차에서 내려 두었던 모든 짐들과 구멍이 난 타이어를 다시 실어 주곤, 커다란 지렛대로 포포를 뒤편에서 들어주어 내가 더 빠르고 쉽게 잭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거의 이 모든 것이 마쳐졌을 즈음, 뒤에서 경찰차가 다가왔다. 거기서 내린 경찰은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한 5분 정도 통행을 막을 테니 빨리 마무리 지으라고 말해 주었다. 이렇게 위험한 갓길에 차를 대면 어쩌냐며 큰 소리를 내었다. 나는 너무 미안하다고, 도로에서 이렇게 된 것이 처음이고 갓길이 점점 좁아지는데 넓은 갓길까지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고 얘기했다. 경찰은 이건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니고, 내가 차에 치여 죽을까봐 하는 걱정의 말이라고 따뜻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바람 빠진 타이어로 차는 의외로 멀리 갈 수 있으니,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비상등을 켜고 조금 더 안전한 갓길까지 빠져나가라고. 너무나 고마웠다. 잭은 다 내려졌고, 오스카도 지렛대를 내려놓았다. 이제야 포포는 스페어 타이어를 장착한 상태로 제대로 서게 되었다. 고맙다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경찰은 빨리 가라고, 통행 제한 빨리 풀어야 한다며, 앞으로 조심하라 그랬다. 오스카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가, 브라더! 도와줘서 고마웠어!' 하고 너무나 쿨하고 멋지게 말했다. 왜 그가 내게 고맙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하고 싶었지만 나는 어서 차에 타 집으로 향했다. 오른쪽 차선에서 느릿느릿하게 운전하는 내 옆으로 오스카의 트럭과 경찰차, 그리고 그 뒤에서 이 소중한 일요일 저녁을 낭비하며 기다렸을 많은 차들이 비껴갔다. 그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혹시나 앞으로 도로 통제가 있다면 절대로 불평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엄청나게 경직된 채로 운전을 하고 있으려니 아내가 고생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내도 분명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얼마나 오스카와 경찰에게 고마운 일인지, 그 덕분에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그 와중에 그 경찰 분이 참 예뻤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한 15분 후, 우리는 비로소 '홈 스윗 홈'에 도착했다. 아직도 조금 손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보리와 구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꼬리를 바르르 떨며, 므에엥! 우와앙! 하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우리가 살아서 왔다, 이 자식들아.'


 둘 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한껏 꼭 안았다. 아내의 촉촉한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의 몸에 딱 맞는 얇은 노란 긴 원피스 위로 그의 따뜻한 맨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가슴에 아내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볼, 이마,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숨 냄새가 포근했다. 별 일 아니라면 별 일 아니지만, 어쨌건 한바탕 삽질을 하고 잘 살아서 돌아왔다. 그걸로 된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 사람과 함께라서 너무나 다행이다. 그리고 또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식탁에 앉아서 집에 있던 약고추장과 나물을 비벼 아주 매콤하게 비빔밥을 해 먹었다. 걱정이 스르르 풀려가며 웃음이 났다.

 그럼 나는 후회를 했는가 하면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유일한 반성이라고 하면 너트를 풀 때 다음엔 조금 더 조심을 해야겠다는 것 정도였다. 못이 박힌 것을 알아차린 순간 집을 향했다면 별 일 없이 집에 올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출발했다면 오히려 38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날씨에 더 금방 타이어가 손상되었을 수도 있고, 교통량도 훨씬 많아 더 위험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집에 일찍 올 수 있었더라도 타이어를 교체할 걱정만 하며 속상하게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선택으로 내 걱정에 대한 강박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그 날 아내와 친구들과 클라이밍을 하며 아주 소중하고 멋진 경험을 한 층 더 쌓았다. 물론, 이렇게 클라이밍을 하지 않고 바로 내려왔다면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갓길에 갇힌 나름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열심히 힘을 모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지나가는 행인', 바로 오스카, 그리고 그의 요청으로 찾아온 경찰의 순전한 호의를 받으며, 아무리 세상이 개판이어도 인간은 역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따스함을 모처럼 되새길 수 있었다. 걱정을 미루어두고 아무런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어떻게던, 좋게 해결이 되었다.

 그 상황을 아마 한동안은 잊을 수 없겠지만, 분명 모르는 새 그 기억은 계속해서 깎여 나갈 것이다. 이를 최대한 잘 기록해두기 위해 쓴 이 글을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읽으며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큰 숨을 쉬곤 조용히 웃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아내와 함께 우리에게 찾아올 크고 작은 해프닝들을 잘 넘겨가면서, 고마운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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