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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Oct 21. 2022

아주아주 두꺼운 삶을 위하여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읽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두려웠다. 세월호와 관련된 수많은 이견과 정치적 이슈들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지쳐있는 상황에서 어떤 이야길 해야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완벽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단지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휴대폰 액정 너머로 글썽이던 눈물은 멈췄다는 것. 그 말인즉슨 우리가 세월호를 소비하는 일은 끝났다는 것. 이제부터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해졌다.



아주아주 두꺼운 죽음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세월호 생존 학생, 형제자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책장을 열흘에 나누어 읽었다. 내용이 크게 어렵지 않았는데도 감정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죽음을 읽어 내려가는 새에 죽음이란 원체 반복하여 곱씹어 보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며, 그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는 결말 따위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죽음에의 성찰은 쉽게 거절당하곤 한다. 마치 아주 두꺼운 철학책을 읽는 과제를 부여받은 것처럼. 처음에는 밑줄을 그어가며 책장을 넘길 수 있을 지라도 일상적인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쉽게 책 사이에 책갈피를 밀어 넣게 되고 책은 책장의 한구석에 꽂히게 된다. 설령 완독한다 해도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답을 달지 못한 채 어려운 말만 잔뜩 늘어놓은 심오한 책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 십상이다. 진실된 애도를 하게 되기까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 것일까.



죽음에의 슬픔을 해소하는 방법

 지난 4월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이명만 웅웅거리는 듯한 시간이 지나가고 잠시 모든 감정이 멈춘 사람처럼 일상을 견뎌야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을 교육받으며 자라온 나에게 있어 울음은 너무나도 두려운 상태였고 그 어떤 종류의 감정도 받아들이거나 표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다른 글에 눈물이란 방파제를 넘어오는 파도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나의 눈물 혹은 너의 눈물은 무엇이 흘러 들어올지 모르는 빈틈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슬픔을 목뒤로 끄윽끄윽 삼켰다.

 하지만 바다가 방파제가 막을 수 없는 무언가이듯 슬픔도 내 삶에 방어기제들을 넘어 들어왔다. 외삼촌이 너무도 그립고 장례식에 가지 못한 것이 속상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정체가 불분명했던 두려움은 눈물과 함께 흘러 나가버렸다. 그리고 멋쩍게도 눈물은 기어이 멈추었다. 이 눈물은 이쯤 하면 됐다는 걸 느끼는 게 꽤나 웃기고 후련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란 없는 거구나. 눈물은 흐를 만큼 다 흐르고 나면 그 흘러들어온 틈으로 빛도 바람도 들어오는 것이구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해소법은 삼키는 것이 아니라 울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을 막으면 곧 삶과 숨이 같이 막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슬픔을 누릴 때 우리는 쉬이 결론에 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끼곤 하지만 결국 슬픔을 누리는 것만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 사람을 위해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죽음의 디테일에 관심을 가진다. 죽음을 경험한 환경이 어땠는지, 죽음 뒤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많은 이가 죽음에의 사유를 피곤해하기도 하지만 죽음이 연발되는 사회에서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하는 이들도 있다. 지겹고 힘겹게 죽음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삶을 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교정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모든 인터뷰에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있구나, 하는 거였다. 떠난 이의 죽음이 두꺼운만큼 남겨진 이들의 삶 또한 매우 두껍고 다양했다. 그럼에도 생존 학생들과 형제자매들이 세상에 요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기억해달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죽은 일과 살아간 일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배 안에 있었던 많은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달라는 것인지도.

 그렇다면 배 안팎의 10대들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지도 말고 딱 그만큼만. 그들은 청소년기 친구와 형제자매를 잃었고 침몰하는 배 속에서 건져져 온 세상이 퍼붓는 무례한 관심과 저주를 온몸으로 견뎠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공통된 경험이라면 각자 친구들과, 가족들과, 환경과 상호작용했던 방식과 절차는 모두 다르고 다양하다. 나는 남겨진 이들과 떠나간 이들을 위해 세월호를 생각할 때, 그 모든 것을 생각한다. 이런 죽음, 저런 죽음, 억울한 죽음, 너무 어린 죽음, 남겨진 사람이 있는 죽음… 친구를 잃은 삶, 어린 나이에 상주가 된 삶, 갑자기 외동이 된 삶, 다 잊고 싶은 삶, 저항하고 싶은 삶, 동생을 살리지 못한 동생의 친구들이 원망스러운 삶, 살아남아서 미안한 삶... 그 모든 것을 같이 생각한다. 섣부른 가치판단을 제한 채, 그저 생각한다.


/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거죠. 형제자매한테는 생존학생들이 완전히 편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유가족 비난하는 사람들은 생존학생들도 엮어서 비난하거든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건데... 친구는 못 왔고 나만 왔어... 월화수목금토 거의 한달 내내 장례가 있었어요. 그런데 얘들은 다 그걸 겪고... 저는 걔네들한테 욕하고 이런게 막 슬퍼요. (p.340)

/ 사고 초기에는... 걔네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죠. ‘내 동생도 데리고 나와주지. 그럼 내 동생도 옆에 있었을 텐데.’ 근데 걔네들이 그 정신없는 와중에 어떻게 하겠어요? 머리와 마음의 갭이 너무 큰 거죠. 갭이 있다는 게 너무 싫고 내가 너무 나쁜 년 같고 스스로가 경멸스러운 거예요. 계속 그 마음이랑 싸웠어요. (p.340)

/ 저는 싫은 말이 뭐냐면, “걔 운명이 거기까지였던 거야”라는 말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거기까지였다는 말이 되게 싫어요. 운명이 거기까지인 사람이 어딨어? 다 늙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지. 이게 운명이었냐고. 그런말 들으면 짜증나는데, 사람들은 쉽게 말해요.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는 말도 저는 너무 싫어요. 산사람을 제대로 살게 할려구 지금 이러는 건데, 산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참... 유가족들이 우리만 잘 살려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그 말 하면서 그냥 참고 살라고 해요. 그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근데 생각있게 살아야지!”(p.325)


 그들에게 가장 공격적이었던 말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첫 문장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냈기에 우리는 산 사람들이 또 죽지 않게 하기 위해 다른 말로 그것을 대체해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장을 넘기고 넘겨도 마지막 장에 닿을 수 없는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하고 싶은 것은 그 대답을 계속 생각하고 살아보겠노라는 것. 아주아주 두꺼운 삶이라는 책을 한 장 한 장 제대로 살아나가게끔, 삶을 위하여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고 너희의 죽음을 기억하겠노라는 약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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