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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May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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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가 독립을 하는 바람에 큰 방을 쓰게 되었다. 짐을 어서 옮겨야 하는데 몸뚱아리와 몇 가지 필수품만 임시적으로 옮기고 이사를 미루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엄마는 작은 방의 물건들을 문 밖에다 다 꺼내놓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어서 치우지 않으면 이 잔소리에 아빠도 동참하게 될 것이기에 위협적이었지만, 일단 출근을 해야 하는지라 대충 큰 방으로 박스들을 옮겨 놓는 중이었다.

 방 정리는 곧 추억 여행의 시간. 유치원인가 어린이집을 졸업하며 받은 두 장의 상장이 보였다. 한 장은 음악상, 한 장은 글짓기상. 음악상은 내가 여러 악기에 관심을 보였다며 주신 상이었고 글짓기상은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무엇을 지어서 세상에 꺼내놓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셨다. 아마도 상장 두장씩은 유치원의 모든 아이들에게 다 돌아갔겠지. 선생님은 나의 어떤 면을 들여다보고 음악상과 글짓기상을 택하셨을까 궁금해졌다. 그냥 업무의 일환으로 선생님의 머릿 속에 딱히 각인되지 않는 이성화 어린이의 가능성을 어림짐작해서 상장을 만들어 주셨던 건 아닐까?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며 첫 mp3를 구매한 뒤로 매 쉬는 시간마다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니는 학생이 된다. 시작은 빅뱅이요 이후로는 여러 알앤비와 팝아티스트들까지 섭렵해서 한국어 버전이 없던 빌보드 차트와 멜론 차트를 들여다볼 때는 그 어떤 친구들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컴퓨터 안에 온 우주가 있는데 핸드폰은 볼 필요가 없었고, 집에 들어가면 연락이 안되는 나를 친구들이 짜증나하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기를 바꿔가며 지독한 케이팝과 알앤비 고인물의 인생을 살아나가게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이어나가다보니 고달팠다. 기록해놓은 서류 제출 및 필기시험 응시, 면접 건이 200여건인데 다 잘 안됐다. 하루하루 우악스런 한낮을 견디는 게 큰 과제였다. 비교와 침전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글을 짓고 글모임에 나가고 소책자를 만들어 독립출판했다. 온통 나와 나의 20대로 가득한 글. 선생님은 내 20대가 이토록이나 글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될 줄 모르셨겠지. 그래도 나는 글과 함께 살아남았다.

 만 나이 정책이 시행되면 나는 29세에서 27세로 20대 후반을 보류, 연장당하게 된다. 그래도 나의 신체와 시간은 이제 서른이지 않나. 이제 커리어 딱 정해야지, 그런 소리를 듣는데 자꾸만 그때 꾸었던 꿈들이 평범하고 성실한 내 앞길에 서서 자꾸만 나를 방해한다. 너 글 좋아했잖아, 너 음악 많이 좋아하잖아, 그런 신기루를 꿈꾸며 불안하고 행복했잖아. 유치원 선생님이 알아주실만한 작은 가능성을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 사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와 더한 재능과 멘탈과 비용 기타 등등 치뤄야할 게 너무 많다는 걸 이제 나는 뼈저리게 아는데. 그 시절 무엇이라도 되어야할 것 같았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기분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이제 나는 두 갈래의 기분을 느낀다. 악기를 마구 만지작거리고 동요를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칭찬받고 싶은 마음. 아닌가, 그건 지금의 나에게 위험한 희망고문인가. 아무튼 두번째는 괜히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꾸는 꿈이 나를 붕 띄우는 그런 기분. 아, 적고 보니 이것도 위험한 건 똑같다. 처음 무언가를 꿈꾸던 때가 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어, 하는 약간의 자조 섞인 말을 나는 언젠가 할 수 있을까? 맨날 꿈만 꾸고 하는 건 없는 것 같잖아. 이제 서른이지만. 다시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조금은 허망하고 약간은 허황된 것들을 쫓아봐도 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30대 이후에 닥쳐오는 희망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려줄 학교는 없는 것인가. 가사 쓰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지 한 번 검색해봐야겠다.


* 'Page1'이라는 제목은 코드쿤스트의 노래에서 가져왔습니다. 동일한 이름의 곡이 있는데, 제가 중학생 때쯤 느꼈던 마음이 그대로 고여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음악입니다. 꼭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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