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 해제 소식이 다시 들려온다. 이번엔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지난 2월 초, 우원식 국회의장이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양국 간 문화 교류가 논의됐고, 시 주석은 "좋은 콘텐츠는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5월 한한령이 풀린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이 3월 7일 개봉했다.
중국은 왜 태도를 바꿨을까? 지속되는 내수 침체, 트럼프의 재등장, 한국 정권교체의 가능성 등이 맞물린 결과인 듯. 조만간 상당한 수준의 콘텐츠 시장 재개방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한한령이 풀리면 한류는 다시 폭발할까?
90년대 '대발이 아빠' 열풍으로 시작된 한류는 K-pop, K-contents, K-products 세 가지 축으로 중국을 석권했다. 첫째, HOT부터 수퍼주니어, BTS로 이어진 K-pop 팬덤의 확산. 둘째, <사랑이 뭐길래>와 <별은 내 가슴에> 로 시작해 <대장금>, <별에서 온 그대>, <태양의 후예> 등으로 이어진 드라마 히트작. 셋째, 한류 스타를 앞세운 한국 상품 및 문화 소비의 급증.
2014년, 중국에서 직접 접했던 <별그대> 열풍은 실로 대단했다. 한국에서 매주 두 편이 방송되면 거의 실시간으로 중국어 자막이 달린 해적판이 업로드되어 퍼졌다. 전지현 립스틱은 줄줄이 품절됐고, 왕징(북경)과 홍췐루(상해)의 치킨집에는 '치맥'을 체험하려는 손님이 몰렸다. 뚜레쥬르 매장 앞에는 김수현 등신대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무역협회는 <별그대>의 경제적 효과를 2조 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2016년 <태양의 후예>로 최절정을 찍은 한류 열풍은 사드 사태 이후 한한령이 시작되며 급격히 식었다.
당시 한류의 폭발적 인기는 중국 정부의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상대적 개방성(vs. 일본/서구), 스마트폰 보급 및 소득 증가, 유교적 가치관의 공유 및 한국 엔터 산업의 급성장 등 몇 가지 요소가 맞물린 결과였다.
8년이 지났다. 많은 것이 변했다.
1. 한류는 이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히트상품이되었다.
2. 한국 내 반중 정서가 극도로 심화되었고, 중국 청년층에서도 반한 감정이 감지된다.
3. 중국의 콘텐츠 전반에 대한 검열 및 통제가 더욱 강화됐다.
4. 중국 소비재 시장의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변화는 뚜렷하지만, 전망은 아직 불확실하다. 한층 높아진 기대감에 비해 구체적 예측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K-pop, K-contents, K-products 관점에서 뇌피셜이라도 한번 풀어보고자 한다.
K-pop의 단기 포텐셜이 가장 높아 보인다.
한한령 동안 K-pop 콘서트는 막혔지만, 음원은 계속 유통됐다. 콘서트가 재개되면 폭발적 반응이 예상되고 음원 매출도 끌어올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규제다. 공산당은 이제 아이돌 외모도 간섭한다. 2018년, CCTV가 '예쁜 남자 아이돌'의 방송출연을 제한(限娘令)한 이후, 곱상한 아이돌들이 '터프가이'로 변신했다. K-pop 아이들돌이 굳이 중국시장을 위해 스타일을 바꿀까? 아니면 여성 아이돌들에게 더 기회가 있을까?
타격이 가장 컸던 K-contents는 한한령 해제 후에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방송국 및 제작사 입장에서 중국 대형 OTT에의 판권 판매는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아주 매력적인 수익원이었다. 한한령으로 하루아침에 수십, 수백억 원의 안정적 매출이 사라졌다. 그런데 최신 한국 드라마는 지금도 바이두를 검색하면 어려움 없이 볼 수 있다. 물론 해적판이다. 한한령 기간동안 해적판 소비가 더욱 고착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중국의 동영상 트렌드는 OTT에서 숏폼 플랫폼(더우인, 샤오홍슈 등)으로 넘어갔다. 재정 상황이 악화된 OTT(아이치이의 시총은 최고치 대비 95% 폭락)들이 예전처럼 한국 드라마 판권을 적극적으로 구매할까?
시 주석은 "좋은 콘텐츠"를 환영한다고 했지만, 그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상하이시 선전부 책임자가 경영난을 겪는 영화관 경영진들에게 영화 심의 완화를 약속했다가 몇 주 만에 교체된 사례도 있다. 애국심 고취와 내수 확대 사이에서 콘텐츠 정책은 점점 보수화되고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 딥시크의 출현 속에 애국심 재무장의 모멘텀이 강화되고 있다. 최근 144억 위안(약 2.9조 원) 흥행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너자2>의 사례도 이 흐름을 보여준다.
K-products는 더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 젊은 소비자들의 자국 브랜드 선호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로컬 브랜드들은 품질과 디자인에서 더 이상 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의 마케팅 혁신은 이미 외국 브랜드들을 한참 앞서고 있다. 럭킨커피와 마오타이가 협업해 만든 '마오타이 라떼'는 하루에 500만 잔을 팔았다. 이제 한류 스타를 모델로 내세워도 10년 전 같은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편, 변화된 환경 속에 리스크가 훨씬 커졌다. 이제 한류사업에서 잠재 리스크 관리는 성과 창출만큼 중요해졌다. 리스크는 쌍방향이다.
먼저 중국 내 보이콧 가능성이다. 애국심 고조 트렌드 하에 다수의 글로벌 브랜드들이 예상못한 트집으로 보이콧을 당한 사례가 많다. K-pop 아이돌의 한마디, 드라마 속 작은 디테일까지 논란이 될 수 있다.
한국시장에서의 역풍 리스크도 커졌다. 몇년 전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는 역사 왜곡 논란으로 2회만에 방영이 중단되었고, <빈센조>는 중국 식품 브랜드 PPL(하필 비빔밥!)로 역풍을 맞아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한류 스타가 중국 리스크에 섣불리 대응하다 오히려 한국 팬들의 더 큰 반발을 살 가능성도 있다. 한류 개방으로 요우커 소비가 일부 회복되겠지만, 고조되는 반중 감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한한령 해제는 새로운 기회가 될까?
최근 콘텐츠 업계의 한 선배한테 한국 콘텐츠 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고 들었다. 오징어게임 등 글로벌 OTT 히트작이 나오면서 제작비는 급등했지만, TV 광고 시장 위축으로 총 드라마 구매량은 오히려 크게 줄었다고. 대형 제작사로의 쏠림이 심화되면서 생태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한령 해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10년 전처럼 폭발적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리스크도 많아졌다. 기존 방식으로 다시 큰 수익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과실은 일부 대기업들이 독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접근법이 절실하다. 한류의 글로별 영향력을 활용한 중국 플랫폼과의 협업, 중국의 방대한 소재와 우리 제작 역량의 결합, 한류 스타 마케팅에 중국 혁신 마케팅 기법 도입 등등... 창의성과 부지런함이 동시에 요구된다.
지금 생각하면 10년 전 중국은 참 낭만적이었다. 한층 어려워진 현실이지만, 제2, 제3의 <별그대>가 터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