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네로 적응기 ②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아침이면 카페 밖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있기 시작했다. 나도 어느덧 카페네로에서 일 한지 3달째. 그러니까 이제는 처음이라는 변명이 안 통하는 시기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발전이 없었다. 여전히 동시에 2명을 서빙(주문받고 커피 만들고 계산하는 걸 통칭)하는 것이 버겁고, 3명을 서빙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속도가 느려서 다른 멤버들이 계속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고 자기 음료를 먼저 계산해도 되냐고 계속 물어본다. 매장 내부수리로 인해 2주간 휴무였고, 그 이후에는 손님이 별로 없는 오후 근무조로 일했더니 queue management(손님 줄이 빨리 줄어들 수 있게 서빙하는 것)가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닌, 줄어든 것. 그러다 보니 다른 멤버들 눈치가 보였다. 나랑 동선이 겹치는 곳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더 이상 봐줄 시기가 아니다 보니 바쁜데 내가 헤매고 있으면 짜증을 낸다. 나는 원래 동시에 여러 일을 못하는 사람이고, 암기에 약한데, 그 모든 걸 영어로 해야 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 커피 품질도 유지해야 했다.
오전 근무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부점장이자 내 교육을 담당했던 로미나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원래 내가 일에 적응을 잘했다면 일한 지 3달째인 지금은 정식 바리스타로 인정받았다는 뜻인 블랙티셔츠(카페네로 정식 바리스타 유니폼)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아직 교육생을 뜻하는 레드티셔츠(교육생 유니폼을 빨간색이다.)를 입고 있었다. 로미나는 헤매는 날 보고 무슨 일이냐며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왜 서빙이 더 빨라지지 않는 거냐며. What happened?라고 묻는데, 내 대답은 Nothing.이었다. 그냥 더 이상 내가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고, 그게 다라고. 그랬더니 로미나의 대답이,
Because, you don’t trust yourself!
이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나왔다. 어떻게 알았니. 요새 나 자신도 나를 못 믿고 있는 거. 그게 이렇게도 티가 나는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맞다. 나는 나를 못 믿고 있었다. 3달째였다. 3달째. 다른 사람들은 1 달이면 받는 블랙티셔츠를 나는 3달째 못 받고 있었다. 여전히 느리고, 여전히 못 외우겠고, 여전히 실수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게 내 개인 문제면 상관없는데, 내가 실수하면 다른 멤버들이 커버해줘야 하니까 그게 너무 미안하고 못 견딜 것 같았다. 멤버들도 봐주는데 한계가 있지.. 슬슬 눈치 보였다.
그래서, 로미나의 말에 펑펑 울었다. 미안했고, 속상했다. 손님이 미친 듯이 많은 오전 근무조를 할 때마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끝나고 나면 좀 괜찮아지고, 또 집값도 내야 해서 어떻게든 얼굴에 철판 깔고 버텨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솔직히 집값만 아니었다면, 또는 내 수중에 여윳돈이 있었다면 나는 당장 그만뒀을 것이다.
로미나에게,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면 더 도움이 됐을 수 있잖아. 만약에 나라는 사람이 이 직업에 맞지 않으면 어떡해?’ 라며... 온갖 찌질한 소리를 퍼부었다. 착한 로미나는 포기하지 말라며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하게 만들었다. 웃긴 건 카페 앞 야외테이블에서 이렇게 진상을 부리고 있는데 갑자기 쓰고 있던 내 안경이 부러졌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집에 왔다. 오랜만에 날씨가 좋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 기분을 환기시키고 싶어서 오랜만에 햄스테드 히스 공원(Hampstead Heath Park-런던 북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공원. 영화 노팅힐에 나왔다.)에 갔다. 영화 노팅힐에 나왔던 켄우드 하우스와 팔리아멘트 힐 전망대에 올랐다. 평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그 넓은 들판이 모두 내 것인 것처럼 눈에 한가득 푸른빛을 담고 왔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수많은 런던 시내 빌딩들을 바라보면서 다짐했다.
‘내가 반드시 여기에서 살아남으리라. 제대로 자리 잡고 살아남아서, 런던 내에 내 집을 갖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고, 영어로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그렇게 이 영국에 자리 잡아 보리라.’
그 후 얼마 뒤, 드디어 정식 바리스타를 뜻하는 블랙티셔츠를 받았다. 카페네로는 처음 입사하면 Training Barista라고 쓰여있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일한다. 그러다 일이 좀 익숙해지면 진정한 바리스타로 인정하는 의미로 Barista라고 써져 있는 검은색 티셔츠(이하 블랙티셔츠)를 준다. 사람별로 블랙티셔츠를 받는 시기는 다르며, 매니저가 판단하기에 일이 익숙해졌다 싶으면 줄 수 있고, 간단한 온라인 테스트도 통과해야 한다.
처음으로 매니저 모니카와 매장 오픈 근무를 하던 날, 추워진 날씨에 미친 큐(queue-대기줄)를 서빙하느라 정신없는데 모니카가 원래 배정된 근무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끝내란다. 뭐지 싶어 가보니 블랙티셔츠를 드디어 주겠다고! 블랙티셔츠를 받기 위해선 온라인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앉아서 그걸 풀라고 했다. 모르는 문제가 몇 개 있어 끙끙대고 있으니, 지나가던 동료 도비가 뭐하냐고 물어본다. 블랙티셔츠 시험 친다니까
“드디어?!! 모르는 거 다 물어봐!! 모니카에겐 말하지 말고!!”
그러더니 5분마다 사무실로 들어와서 답을 알려줬다. 매니저인 모니카가 자기를 죽일 거라면서도 계속 사무실 들어올 핑계를 만들어서 나를 도와줬다.
그렇게 겨우 온라인 테스트를 통과했다. 모니카가 와서 보더니, 사물함에서 블랙티셔츠를 꺼내서 나에게 줬다. 내가 이것 때문에!! 이게 뭐라고 얼마나 속상했던가!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무능력하게 느껴져서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드디어! 블랙티셔츠로 승급할 수 있었다! 티셔츠를 받자마자 울어버렸다. 내가 얼마나 좌충우돌하고 마음고생을 했는지 아는 매니저와 도비는 잘했다며 한 번씩 안아줬다. 그리고 모니카는 이렇게 말했다.
Trust yourself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무슨 일이든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을 느꼈다. 한국에서 카페 바리스타라면 사실 아르바이트에 가까운 개념이라서 나도 쉽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직업으로서 일하는 멤버들을 보면서, 그리고 나도 런던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게 될진 몰라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 정말.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던 나 자신을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로미나도 모니카도 나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다. “Trust yourself”. 단순 업무로 여겨지는 이 일을 할 때도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렇게 드러나는데, 정말 내가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할 때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얼마나 더 중요한 역할을 할까? 카페네로에서 일하면서 인생을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