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드라마 <하얀거탑>
일본 소설가 야마자키 도요코가 1963년 선데이 마이니치에 연재를 시작한 <하얀거탑>은 신문에 발표된 직후부터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연재가 끝나자마자 바로 단행본이 발간되었고 이후 50년간 자국 내에서 문고판 도서 3세트, 영화 1편, 드라마 5편이 제작될 정도였으니 그 인기와 영향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학병원에서 펼쳐지는 권력투쟁과 의료분쟁이 드러내는 인간사회의 모순은 비단 1960년대 오사카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메시지는 44년이 지난 한국에서도 유효했다. 제작발표회 때만 해도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던 <하얀거탑>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시청자들을 매료시켰고, 종국에는 우리나라 의학 드라마의 상징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여운이 오죽 깊었으면 오늘날에도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의료와 관련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용재오닐의 바이올린 연주곡 <B-Rossette>이 흘러나올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하얀거탑>을 단순히 의학 드라마로만 분류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로 <하얀거탑>에서 의학이나 병원 등의 소재는 장치에 불과할 뿐, 그 본질은 정치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정치하는 드라마. <하얀거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얀거탑>의 스토리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전반부는 국내 최고로 평가받는 명인대학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 장준혁과 노민국이 벌이는 암투가, 후반부는 장준혁이 집도한 환자의 사망사고에서 비롯되는 의료분쟁이 각각 극의 주된 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주인공 장준혁은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인물이다. 어느 드라마가 그렇지 않겠냐만, 장준혁이야말로 드라마의 메시지를 온몸에 응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곧 <하얀거탑>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장준혁에 대한 이해 없이 <하얀거탑>을 온전히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있음으로써 <하얀거탑>은 보통의 드라마와 대조된다.
대부분의 드라마는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한 채 출발한다. 주인공은 당연히 선량한 사람의 대명사다. ‘천사가 악마와 갈등을 빚고 모진 시련도 겪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여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해피앤딩은 우리가 드라마나 문학에서 숱하게 봐온 전형적인 권선징악, 인과응보 플롯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그 흔하디흔한 플롯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물들의 역할을 바꾼 채 시작된다. 유능하고 신망도 두터운 인물, 그러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부패와 협잡도 서슴지 않는 권모술수의 달인. 장준혁은 그런 인물이다.
그는 명인대학병원 외과 과장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경쟁자 노민국을 찾아가 읍소하는 한편 장인의 재력을 바탕으로 동료 교수들의 표를 매수한다. 자신의 오진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대목에서는 부하들을 총동원해 기록을 조작하는가 하면 관계자들의 위증을 교사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온 국민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악역이 틀림없다. 그러나 감독은 불친절하게도, 시청자가 장준혁을 악당으로 오해할세라 끊임없이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이를 꼬아놓는다.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자, 부하직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상사이자,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친구로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끊임없이 부각된다. 그래서 장준혁은 결코 한 문장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이다.
전통적인 드라마였다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따라 양심이 비추는 길을 걷는 최도영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얀거탑>에서는 아니다. 사람들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장준혁을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것은 인간 장준혁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극 중 장준혁은 국내 최고대학에서 인정받는 외과의이지만,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인물이다. 때로는 비루하기도 하다. 자신을 향한 화를 거두지 않는 부원장에게 용서를 구하며 무릎을 꿇고, 중요한 수술에 앞서선 사약처럼 진한 커피를 마시며 피로에 찌든 몸을 지탱한다. 제작진은 거기에 더해 장준혁의 현재 지위가 그 고단함을 희석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청년 장준혁을 호출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앞에 장애물이 놓일 때마다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들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성공한 의사가 되려는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들, 예컨대 아들, 상사, 친구, 사위, 남편, 애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떠안으려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장준혁의 삶이 얼마나 서글프고 고단한지를. 그래서 그를 응원하지 않고서는 이 고달픈 현실을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장준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사회의 각박한 현실이 집적된 화신이었다. 하지만 얄궂은 <하얀거탑> 제작진은 그가 모두의 응원과 박수를 받아 외과 과장 자리에 앉은 순간, 정말 인생의 모든 걸 다 걸고 꾸역꾸역 정상에 다다른 그 순간에,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의료소송에 휘말린 장준혁은 그간 쌓은 명예를 순식간에 잃고 급기야는 담관암에 걸리고 만다.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돼 간성혼수가 왔을 때, 나는 신문을 거꾸로 들고 자신의 질병도 인지하지 못하는 장준혁을 보면서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요절할 줄 알았더라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해달라며 자기 마음의 지향과도 같았던 오경환 교수에게 유서를 남긴 프로페셔널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쌓아 올렸던 의학이라는 이름의 바벨탑이 정작 산산이 부수어지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던 건 아이러니다. 치열한 인생 끝에 남은 것은 갈기갈기 찢어진 자아와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육신뿐이었다.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 핵심부에 우뚝 선 이후 김대중 정부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치권의 2인자로 군림했던 김종필은 말년에 “정치는 허업”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종필이 어떤 사람인가. 불과 서른다섯에 일으킨 쿠데타가 성공한 이래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숱하게 지내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산증인이었다. 그는 1963년 가을, 서울대학교에서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들과 가진 토론회에서 우리나라가 외국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한편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수구사상과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게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든, 오천 년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한 것이든 간에, 젊은 김종필의 가슴은 대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라고 해서 그의 삶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아니, 권력자였기에 순탄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김종필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충청의 맹주로 발돋움하고 DJP연합으로 다시금 총리 자리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끝에 남은 건 노회한 구정치인이라는 껍데기뿐이었다. 나는 그의 회한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이라 한들 고달픈 우리네 삶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내게 권력이나 세속적 성공만으로 삶이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함에도 쉬이 잊게 되는 그 이치를 일깨워준 건 드라마 <하얀거탑>이었다. 이 드라마가 없었다면 꺾인 채 굳어버린 날개를 휘저으며 불빛을 쫓아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자의식이 거세된 채 남들이 쌓아 올린 욕망의 탑들을 우러르면서. 그런 점에서 <하얀거탑>은 나로 하여 삶을 조금이나마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다.
욕심에 눈이 멀 것 같은 순간, 나의 만족이 아닌 타인의 인정을 바라며 맹목적인 성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할 것만 같은 순간, 나는 늘 장준혁의 죽음이 남겨준 교훈 되새기며 스스로 묻는다. 내가 쌓고자 하는 거대한 탑은 과연 무엇이냐고. 그 탑이 완성되면 나의 삶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