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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Sep 23. 2020

2000년대 그곳엔 심야영화가 있었다

내가 20대 초반을 향유했던 방법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아마 그 지리적 요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뀐 자리에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정법원이 있었다. 이혼 재판을 앞둔 부부들은 시청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덕수궁 대한문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그 길을 반드시 걸어야 했다.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울분을 꾹꾹 참아가며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혼 재판은 언제나 결과가 정해져 있다. 설령 재판관이 “4주 뒤에 뵙겠습니다”라며 숙려할 시간을 주더라도 이혼당사자들이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금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을 느끼는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한번 깨진 인간관계는 원래대로 회복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나 쓸쓸하다. 누군가에는 낭만적인 그 길이 또 다른 누군가에는 지긋지긋했던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와도 거리가 멀던 나는 그 지리적 요인 때문에 덕수궁 돌담길을 좋아했다. 그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이 여럿 놓여있었다. 미술관과 카페, 영화관 같은 곳들이다. 나는 걸핏하면 방앗간을 기웃거리는 참새처럼 그 길을 쏘다녔다. 시청역 앞에서 들어가 강북삼성병원이 보이는 곳으로 나가는 그 길 안에서 온종일 머물렀던 날도 제법 있다. 


그런 날은 대체로 일정이 비슷했다. 오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뒤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다. 식사를 마치면 주한캐나다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서 조금 쉰다. 이후 신문사 건물에 붙어있는 시네마정동에서 영화를 한두 편 본다. 영화를 두 편쯤 보고 하늘이 어스름해지면 옆 건물에 있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고 귀가한다. 얼핏 지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예술이 주는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술관에 가고 영화관에 가는 행위 자체를 즐겼기 때문이다. 대학생 혹은 미취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를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누릴 수 있으랴. 오죽 영혼이 없었으면 영화관에 입장할 때 무심코 티켓을 내밀었는데 그게 오전에 관람했던 시립미술관 특별전의 티켓인 경우도 가끔 있었다.


시네마정동은 내가 좋아했던 종로의 여느 극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간은 넓었지만 관객은 적었다. 대부분의 관객은 직장인이거나 중장년층이었다. 시청‧광화문 일대는 젊은 층 유동인구가 많은 홍대‧강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다. 그 영화관에는 남다른 차별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요즘 세상에는 보기 드문 심야영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야영화라고 하면 종종 이상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시네마정동이 그런 영화를 취급하는 곳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시중 상영작을 심야시간대에 틀어주었을 뿐이다. 만 얼마 하는 돈에 세 편을 한 묶음으로 해서 연속으로 틀어준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영화는 자정 무렵 시작해 해가 뜨고 난 뒤에야 끝났다. 이것은 꽤 강행군이었다. 특히 새벽 3~4시쯤에는 정말 영화를 보는 건지 쏟아지는 잠을 참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 편이 모두 끝나고 얻어지는 성취감은 대단했다. 남들은 다 자고 있을 시간에 영화를 세 편이나 봤다는 것. 나는 이것이 마치 문화적 소양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일상의 고단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문화예술인의 한 갈래인 듯 느껴졌다. 


물론 그런 자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청역에서 이른 아침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며 이내 깨졌기 때문이다. 남들은 저렇게 열심히 사는 데 난 이게 뭐람. 그때 느꼈던 감정은 밤새 술을 마신 뒤 첫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것과 유사했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는 조금도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 자괴감을 알면서도 걸핏하면 심야영화를 보며 밤을 새웠다. 그럴 때마다 주문처럼 자기합리화를 되뇌었다.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은데 뭐 어때,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청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내가 처음 시네마정동에서 심야영화를 본 것은 2009년 봄날이다. 그 날 <더 리더>와 <슬럼독 밀리어네어>, <쇼퍼 홀릭> 이렇게 세 편이 연속 상영되었다. <더 리더>가 전해준 충격과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며 느꼈던 흥미진진한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다. 사실 <쇼퍼 홀릭>은 <섹스 앤더 시티>류의, 허영심 가득한 뉴요커들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탐탁지 않았지만 막상 보고나니 그런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첫 기억이 좋으면 이후 다소 부정적 정보가 입력되더라도 긍정적으로 판단하려는 관성을 버리지 못한다. 나에게는 시네마정동이 그랬다. 더욱이 심야영화의 구성도 내 취향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늘 세 편 중 두 편 이상은 내가 좋아할 만한 유형의 영화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나의 영화 보는 안목이 출중한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극장관계자가 영화를 배치하는 기준과 내 취향이 이토록 기가 막히게 일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 편 중 두 편 이상이 마음에 들 때만 내가 영화를 보러 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으면 애초에 그 개고생을 해가며 영화 볼 생각을 안 했으니. 앞서 언급한 영화에 대한 뛰어난 식견이란 건 결국 선택 편향의 결과물인 셈이다.


2000년대가 끝나고 거짓말처럼 시네마정동은 문을 닫았다. 그 이후 심야영화관은 좀처럼 보기 어려워졌다


시네마정동이 문을 닫은 것은 얼마 뒤였다. 2010년대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문을 닫았다. 영화관을 소유하고 있던 신문사는 사업 구조조정을 위해 2010년 10월 24일 자정까지만 영업을 한다며, 모아놓은 마일리지는 그날까지 모두 사용해달라는 안내문을 극장 입구에 붙여 두었다.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갔다가 문 앞에서 그 안내문을 읽고 있는데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신문시장이 주저앉고 있던 시점에 변변한 이익을 내지 못하는 영화관을 떠안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나는 추억 서린 공간 하나가 또다시 사라진다는 것에, 그 이유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경영악화라는 것에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늦은 밤.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한 밤. 그런 밤이면 종종 그때 그 심야영화가 그리워진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밤새 영화를 보고, 아침이 되면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가고, 집에 가면 또 퍼질러 자고. 넓고 넓은 시간의 바다에서 때론 허우적거리고 때론 유유히 헤엄치며 보냈던 이십 대 초반의 나날들은 내가 그 시기를 향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무한정 주어지기라도 한 듯 나의 시간을 탕진할 수 있었던 날들이, 때론 자괴감을 몰고 오기도 했던 그 여유로운 일상들이, 푸르렀던 청춘의 기억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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