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캐리어 1개, 배낭 4개, 아이들 베개와 침낭이 든 가방 2개, 구명조끼 네 개, 대형튜브, 그늘막 텐트, 돗자리, 간식 가방 등등등.... 산더미 같은 짐을 겨우 욱여넣고 트렁크 문을 닫으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 멤버는 나와 남편, 아들(지호), 아들 친구(예명 '수'라 지칭)까지 4인. 우리를 태우고 여행길을 떠날 애마는 12년 된 구식 프라이드. 아직 10년은 더 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놈도 나이를 먹는지, 트렁크에 짐을 잔뜩 싣고 사춘기 청년 둘과 어른 둘이 타니 차체가 후들후들, 엔진 소리는 그렁그렁 한다. 아차, 시동과 에어컨을 같이 켰구나. 에어컨을 잠시 끈다. 지난겨울부터 이놈은 시동과 에어컨(혹은 히터)을 같이 켜면 아주 힘겨운 소리를 낸다. 이놈도 나이를 먹은 것이다. 미안하다. 이번 여행까지만 힘 좀 써줘.... 가을에는 꼭 카센터를 가봐야겠다고 다짐한다.
8시 30분에 서울을 떠났다. 금요일 출근시간을 거쳐 서울을 빠져나가니 뻥 뚫린 고속도로가 나타난다. 차가 막히지 않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뒷좌석의 아이들은 창가에 눈길 한번 안 주고 게임에 열중한다. 우두두두 핑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여행길에도 어김없이 목숨을 건 혈투 중인가 보다. 앞자리 어른들끼리 그래도 태풍이 지나가서 다행이야, 남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맑네...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로운 여행길이다.
내가 네 번 정도 "게임 소리 좀 줄이라고 했지!"를, 아이들은 "휴게소! 급해요!"를 두 번 정도 외치고 나니 광주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4시간(휴게소 시간 빼고)이면 양호하다. 아이들의 캠프가 열리는 곳은 광주 외곽에 위치한 지혜학교. 이곳은 독서와 철학을 기본과정으로 하는 중고등 통합 대안학교인데 여름방학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독서캠프가 열린다. 쉽게 말해 학교 맛보기 성격의 캠프가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도착하면서 발생했다. 분명 이곳 독서캠프는 학부모 없이 아이들끼리 숙식을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럴 수가... 사실 이번 독서캠프를 오게 된 건 우리가 먼저 지호에게 의사를 물어봤고, 지호와 6살 때부터 형동생으로 지내는 친구 '수'에게도 동행을 권유했다. '수'의 어머니와 나는 오래 알고 지내고 공동육아도 하던 사이라 '수'의 어머니도 '수'에게 적극 권유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지호와 '수'는 이번 캠프를 같이 하게 된 것인데....
"지호 형 엄마 아빠는 같이 안 간다고요?" 수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응. 캠프는 부모님 없이 하는 거야. 엄마가 설명 안 해주셨어?" 수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이럴 수가.... 어쩌지?
지호는 6학년, 수는 5학년이다. 둘 다 부모 없이도 캠프에 참여할 만큼 씩씩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수는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고.... 우린 우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마당과 호수가 펼쳐진 예쁜 카페였다. 먼저 시원한 팥빙수를 시켰다(언제나 달다구리는 기분을 좋게 한다). 그리고 바로 물수제비 뜨기를 했다. 아이들은 정신이 쏙 빠져 신나게 물수제비를 날렸다.
그런 후 이 기세를 몰아 '수'에게 이번 캠프도 아주 신날 것이며, 독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승마와 물놀이 축구 등등 함께 하는 활동이 아주 많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서울에서 온 아이들도 있고 광주에서 온 아이들도 있으니 서로 어울려 지내면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선생님들도 정말 좋으신 분들이고 잘해주실 거라고... 마지막으로 우린 어릴때 이런 기회가 없었다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에 발린 소리를 실컷 늘어놓고 조마조마하게 '수'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기숙사는 몇 명이 같이 써요?"
'수'에게는 다른 아이와 함께 방을 쓰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두 명 내지 많아야 세 명이 함께 방을 쓸 것이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건물이 되어있고.... 아! 선생님께 특별히 지호와 '수'가 같이 방을 쓰게 해달라고 말해두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의 표정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다...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에 막막해졌다.
그런데 그때, 지호가 나섰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수'를 툭 치더니, "선생님 모르게... 우리 밤새 놀자."
수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호를 봤다. 지호는 계속해서 간식을 몰래 숨겼다 먹자, 배달앱으로 음식을 시키자, 심지어 기숙사를 탈출하자는 둥 아무 말이나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은 어이가 없었지만 '수'의 표정은 점점 나아졌다. 아들의굴하지 않는 장난기가 쓸모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아이들의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들은 후에야 겨우 아이들을 캠프에 입소시켰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잘 해낸다는 걸 알기에 밝게 인사 했다.
"우리도 학교에 같이 안 있을 뿐이지, 여기 근처 가까운데 있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 알았지?"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선생님들께 인사를 한 후 발걸음을 돌렸다. 후련해하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못내 마음에 걸린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