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일 자로 잘 나가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남들보다 뒤늦게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최근까지 열심히 일을 했으니 조금만 쉬었다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실업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쉬면서 집 안 일을 도맡아서 충분히 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직장 일을 하면서도 집 안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맘속으로 자신감이 있었다.
가정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아내가 첫 직장을 가지게 된 시점부터다.
아내는 2018년 2월 1일 입사 첫날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챙기고 6시경에 출근을 하여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시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으며,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그저 요일일 뿐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은지 오래다.
딸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분가하여 많은 부분에 걸쳐 집안일을 했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집안일을 좀 더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출근 시간이 빠듯해졌고, 퇴근 시간을 조금 앞당겨 집안일에 더 시간을 할애하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내가 집안일을 한다는 것이 일종의 칭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정적인 남편, 아내를 위하는 남편, 집안을 먼저 생각하는 남편,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슈퍼맨? 뭐 이 정도 소박한 느낌이랄까?
일이 힘들거나 전날에 지인들과 술을 한 잔해도 다음 날 아침 5시경에 일어나서 밥을 지어 식사 준비를 하고, 아내가 먼저 식사를 하고 직장으로 출근하면 설거지를 하고, 6살짜리 딸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했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아이를 맡겨 놓은 장모님 집에 들러서 아이를 데려오고 목욕을 시키고 집안 정리하고, 밀린 빨래가 있으면 빨래를 하고, 쓰레기 정리와 화장실과 거실 청소를 끝으로 하루를 마감했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도맡아 해도 큰 무리 없이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내 생각이었을 뿐, 가정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가정주부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흔히 말하듯 나는 그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초보 주부였다.
대학에서의 연구교수 임기를 끝으로 나의 실업자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지금까지 했던 가사 일에 조금 더 일이 추가되는 정도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큰 부담도 없었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사실 처음은 내 생각대로 살았었다. 그런데, 집안일이 주가 되면서 점차적으로 모든 것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약 10여 년 동안 내가 만들어 놓은 인적 네트워크가 매우 빠른 속도로 희미해져 갔다. 학교에 있었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업인들과 통화를 하고 관련 연구자들과 소통했는데, 퇴직을 하고 난 뒤 지금은 몇몇을 제외하고, 소통이 거의 단절될 정도로 생활이 변해 버렸다. 퇴직 이후에 가장 힘들었던 것을 꼽으라면 바로 단절된 소통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큰 변화는 이전에도 했던 집안일이 더 이상 단순하지 않은 모습으로 전보다 더 큰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너무 쉽게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해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녹녹지 않았다.
6살짜리 딸아이와 매일 치러야 하는 자질구레한 협상들(머리 묶기에서 옷과 신발 고르기 등), 집 부근에 사시는 장모님 눈치, 일로 바쁘고 민감해진 아내 눈치, 남자로서 주부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따른 편견과 소통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
내가 아이를 주로 돌보며 지내면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시선과 질문은 이혼남인가? 사별했나? 2교대인가? 엄마는 어디 갔지?이다. 아빠가 아이를 돌본다는 생각은 맨 나중에야 떠오르는 듯 매우 신기해하고 궁금해한다. 매스컴에서 남자 주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지만 아직도 자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접하면 신기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매일같이 자주 대면하는 70대 어르신이 하루는 나와 아이를 보면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남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니 힘들겠네”라고 하셨다. 다소 당혹스러웠지만, 똘똘한 내 딸아이가 “우리 엄마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답하자. 그 소리에 나이 든 어르신이 멋쩍게 “그래?”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신 적이 있다.
하긴 아내는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하고 자정이 넘어서 퇴근했던 터라 경비 아저씨도 이른 새벽에 내 아내를 볼뿐, 밤에는 어느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었으니 누가 보면 당연히 아빠와 딸, 둘만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웃고 지나갔다.
현재 우리 가족은 아내의 직장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와서 조금은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딸아이는 새로운 유치원에 다니며 적응을 잘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아침 5시가 아니라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면 되고, 아침 8시 반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지금처럼 글을 쓴다거나 하는 개인 시간을 가진다. 오후 4시가 되면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고, 피아노 수업 시간 동안 인근 마트에 들러서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구입한다. 집에 돌아와 딸아이 물놀이 겸 목욕을 시킨 다음 저녁을 먹이고, 책을 읽거나 자유시간을 가지게 하고 8시 30분에 잠을 재운다. 그리고 밤 10시쯤에 직장에서 돌아올 아내를 위해서 가벼운 야식거리나 차를 준비하고 그날 있었던 아내의 에피소드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