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1996년 초에 프랑스로 언어연수를 떠났다. 약 1년 동안 머물면서 사람들을 알아가고, 프랑스어도 공부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했던 점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학교 선배이자 후배였던 나는 그곳 프랑스에서는 오롯이 혼자였다. 그리고 혼자됨이 조금은 무섭고 두려웠지만, 무서움이 호기심으로 그리고 두려움이 행복감으로 변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의 삶도 만족하지만, 누군가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더 많은 것을 해 볼 것을 후회한다고 말할 것 같다. 정말 많은 것에 문이 열려 있고, 많은 것을 접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나에겐 프랑스였으니까. 특히 학생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언어연수기간 동안 꼭 좋은 에피소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에 와서도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동향인들끼리 모이면 그 순간 한국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외국에 나오면 한국사람들의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러 명이 모이기 시작하면 장소가 어디든지 간에 그 순간, 그 시간은 고스란히 한국이 되어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험담"이다.
겉으로 보기엔 험담처럼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유심히 들으면 결국 험담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하고 이야기를 하는 데, 왜 꼭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내뱉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일단 누군가가 자리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운을 띄우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있잖아요" "~것 같아요" " 맞아 맞아" "그쵸?" "큰일이다"이다.
솔직히 나도 초기에는 그 무리에서 빠지면 불편한 외국생활이 되겠다 싶어서 한참을 망설였던 게 생각난다.
한 번은 사람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언젠가 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다. 당시만 해도 나 자신에게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나쁜 소리를 듣는다는 게 무지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닉 하다. 그런 게 싫어서 잠시 떠났는데 프랑스 현지에서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살았다는 게 절로 실소를 만들어 낸다.
이유야 어쨌든 내 차례가 왔다는 게 느껴지는 하루를 맞이했었고, 하루 종일 불편했다. 언어연수 수업을 마치고 오늘 저녁에 있을 모임에 답답함을 느껴서 혼자서 자주 갔던 책방엘 갔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는 우리나라와 달리, 너무나 자유로웠기에 책방에 볼 것들이 풍부했다. 우리나라 같으면(요즘은 덜하지만) 검열에 걸려 나오지 못할 법한 것들도 자유롭게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호기심 충족에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한참을 책방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좋아했던 만화가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시티헌터...
일본 신주쿠 거리를 지킨다는 한 사나이에 대한 내용인데, 진지하면서도 기승전결 코미디로 이어진다. 그 속에 주인공 사에바 료는 정말 엉뚱 발랄하다. 성인물이었기 때문에 보기에 남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만화를 통해서 웃음과 통쾌함을 맛보기도 했었다. 그런 만화책을 프랑스에서 만나다니... 한참을 서점에서 서서 보다가 바닥에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전체 30여 권 이상 중에서 마침 5회까지 프랑스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고, 서점을 나오면서 2권을 모두 구매해서 나왔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어가 능숙하지 못해서 책방에서 만화를 보며 그 속에 불어를 번역하느라 1시간 넘게 만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비록 만화지만,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를 통해서 뭔가를 배운 것이 있다면 우스꽝스러워도 진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남들이 나를 우습게 봐도 나 스스로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서점을 나오면서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더 이상 저녁 모임이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농담도 하고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차피 돌고 돌 험담이라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면 소문에 반응하는 순간 소문이 더 커지는 법이고 오히려 모른척하거나 정말 몰랐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그 소문은 별 탈없이 소멸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정말 그 소문이 맞다면 스스로 인정하면 그 또한 그대로 인정되기 때문에 소문은 거기서 멈추게 되고, 이때 나를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뉘면 그때 가서 달리 생각하면 되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소문은 억지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나부터 남들처럼 근거 없는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들었던 근거 없는 내용을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험담일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점점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한국인들과 거리도 멀어져 자유롭게 생활을 했었다. 자유라고 해 봤자 별 다른 것은 없다.
순순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생활이다. 아무런 걸림돌 없이,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 그 자체에서 벗어나며 살았다.
여담으로 시티헌터 책이 정말 좋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시티헌터는 일본 만화라는 것은 다 알 것이다.
일본 만화책을 프랑스어로 번역을 해 놔서인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다는 점이다.
프랑스 현지 만화는 읽다가 보면 사전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프랑스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는 매우 친숙하게 와 닿는다.
사실 학원에서 배웠던 프랑스어보다 시티헌터 만화를 통해서 배운 바가 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우연찮게 발견한 만화였지만, 나에게 시티헌터는 나의 성격을 변화시켜 주었고, 동시에 나의 프랑스어 실력도 많이 늘게 해 준 보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