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심

by 공삼

이타심이란 행위의 목적을 타인을 위한 선에 두는 것을 말하며, "남을 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나무 위키)

사실 이타심이 강한 경우에는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여 남을 돕거나 남을 위하는 것을 뜻하는 데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하는 이타심은 남을 배려하는 정도로 봤으면 한다.


얼마 전 "이타심의 근원을 탐구하다"라는 주제로 아비가일 마쉬 교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접한 바 있다.

인지과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 뇌 속에 존재하는 편도체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크기가 크면 이타적이고 작으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연구는 늘 오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타심은 후천적으로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서 발달시킬 수 있다고 하는 데 이 또한 편도체의 크기가 변화됨을 지켜볼 수 있다고 한다.

그녀의 연구는 이타심에 대한 해답을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녀가 말한 후천적 교육이 이타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우리 실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딸아이 유치원에 걸려 있는 유치원 교육목표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이타심을 배우고 있다. "서로 돕고"라는 좋은 단어가 보인다.

이처럼 이타심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커가면서 많은 것에 노출이 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배웠던 이타심은 도덕 시간에 나오는 좋은 말일뿐, 실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즉, 자기 편익을 위해서 가치관이 변하게 된다.


가치관이 변함에 대해서 그것이 나쁘다고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살면서 자신의 편익을 배제하다면 사실 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는 것은 자신의 편익을 우선시하면서 최소한의 이타심을 가지고 살면 서로 얼굴 붉히거나 분쟁 속에서 허우적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타심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마음이다.

만일 작은 규모의 마을을 이루는 시골이라면 서로의 사는 모습을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큰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가 흔하다. 즉, 남의 눈치를 보는 환경인지, 그렇지 않은 환경인지에 따라 사람의 심리가 가변적일 수 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타심을 가지게 될까?

어떤 이는 종교를 믿으면 이타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물론 정말 이타심이 강한 신자분들도 계시자만, 내 주위를 둘러볼 때, 신자들이라 해서 이타심이 늘 한결같지는 않았다. 그저 교회나 절에 있을 때 무한 이타심이 입으로 발휘될 뿐이다.


어쩌면 지금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교육 목표가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신 주위 환경에 민감한 이타심을 고려할 때 기본적으로 가정에서부터 이타심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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