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 기온을 느껴보니 어느 정도 더운 여름의 기운이 한 풀 꺾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인근 산 내음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최근 인터넷에 글을 쓰는 행동을 많이 하다 보니
전과 달리,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인터넷 뉴스를 보는 것이다.
전보다 조금 더 일찍 눈을 떠서 약 30분 정도 인터넷 뉴스를 본다.
그런데, 전보다 요즘은 신문 내용이 너무나 험악하다.
전에는 사건 사고 내용이 60% 정도였다면, 이제는 거의 80%가 육박하는 듯하다. 최근 한일 문제도 크게 한몫을 한 탓이겠지?
상쾌한 아침... 기분이 정말 어두워진다.
물론 좋은 내용도 있지만 요즘은 광고와 연계된 내용이 많다 보니 이 또한 신뢰감이 무너진 지 오래다.
최근 뉴스를 접하면서 느끼는 생각은 전 국민들이 타의든지 자의든지 간에 전반적으로 이타심이 결여된 듯하다.
남을 먼저 배려하면, 극단의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만큼 참을성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제주도 카니발 사건에서 최근 한강 시신 사건, 오늘 또 보니 차량 접촉 사건으로 젊은 사람이 60대 노인에게 무차별 폭행을 했다 한다.
물론 매스컴이 매우 발달되다 보니 전 같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사건들이 더 부각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건 내용을 자세히 보면 더 이상 친절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야기가 아닌다. 그리고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건들이다.
어쩌다 이리되었지?
참을성, 인내심은 개인적인 역량 중에 가장 어려운 마음가짐이다.
다른 마음가짐과 달리 인내심은 제재와 거절, 그리고 박탈에서부터 시작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좌절과 실망을 맛봐야만 이룰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인내심을 바랄 수는 없다.
실례로 강아지 교육에서도 흔히 알 수 있는 데...
교육을 받지 않은 강아지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제재당하고 거절당하는 과정을 접한 강아지는 음식을 절제할 수 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이 피교육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피교육자 자신 스스로에게 인내라는 마음가짐은 딱히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피교육자는 인내라는 마음가짐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과의 분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내 교육을 받았더라도 이타심이 결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원인이 될 수 있고, 또는 주위 환경에 의해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경우에 나타날 수 있다.
개인적 경험이 원인이 될 때는 인내 교육을 받았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그리 크게 작용되지 않았을 경우 더 이상 인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까칠해지고 쌈닭이 된 사람이 있다면 이에 해당될 수 있다.
다음은 주의 환경에 의해서 자존감이 실추된 경우인데 흔히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 전반적인 흐름과 분위기에 좌우될 수 있다. 남성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남성우월주위나 남존여비사상에 기반한 성격을 가진 남성의 경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이 가진 그런 성격이 대접받지 못하고, 때로는 폭력자, 무식자로 오인받으면서 자신의 자존감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 있다. 이 경우, 심각할 경우, 이성적 행동보다는 감정적 행동이 선행되는 것을 흔히 지켜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싸움이 날 때 이런 경우를 많이 지켜볼 수 있다. 주로 내용이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이다. 이는 스스로가 인정을 받지 못함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만일 잘났음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으로 이런 문제로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말이 있다.
몇 해 전에 나는 이런 비슷한 경우를 모면한 적이 있다.
지인분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자리였는데, 내 직함이 교수여서 함께한 분들이 "박사님" "교수님" 이렇게 불렀었다.
지어낸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자랑스럽게 수긍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술자리가 깊어질 때쯤 옆 테이블에서 만취된 손님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 박사님인가 봐요? "
" 와, 젊어 보이는 데 어떻게 박사까지 땄는교?"
" 그렇다고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 박사님 박사님하니까 좋은갑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재밌겠다는 표정으로 흘깃 거리며 쳐다보고 있었고, 나에게 질문한 사람은 뭔가를 시비를 걸 작정이었다. 나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은 왜 그러냐고 만류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흐를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이렇게 답을 했었다.
"요즘 개나 소나 다 받는 게 박사 아닙니까, 제가 실력이 부족한데도 어쩌다 보니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다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혹시 저의 언사나 행동이 잘못된 점이 있었는지요? 그렇다면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구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60도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상대는 오히려 멋쩍어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두 사람도 시선을 피했고, 그제서야 "야 임마,,, 그냥 온나,,, 점마 저거는 술만 먹으면 지랄이고.... 빨리 온나"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또다시 시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같이 자리한 분들에게 "제가 술 한 잔 더 대접할 테니 자리를 옮기시지요? "라고 말하고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하신 지인분들은 기업 사장님 2분과 경찰청장 1분, 그리고 변호사 1분이 계셨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기업인과 사회 지도자층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카데미 과정 학생분들과 모임을 하고 있던 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나와 함께한 네 분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데, 젊은 사람에게 박사님~ 교수님~ 하는 것이 보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아마 나의 답변이 그 사람에게는 의외의 답이었던 모양이다.
만일 내가 혹은 같이 자리했던 지인분들 중 한 분이 그 사람이 바라는 답을 내놓았다면 술자리의 결말이 그렇게 좋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일등 해야 한다. 내 것을 챙겨라, 남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 마라, 인생은 쟁취하는 것이다. 등을 배웠다. 이러한 배움에는 이타심이란 요소는 배제된다. 사실 어쩌면 지금의 사회적 문제는 오래전 우리 들의 교육에서 출발된 게 아닐까? 게다가 집안에서의 교육도 사회 흐름과 같이하다 보니 이타심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지향하는 교육을 해왔다.
당시 교육을 하면서 어른들은 자신들의 훈화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여 사회적으로 어떤 잔상으로 남을지 몰랐을 것이다. 당장 아이들에게 힘주어 교육하는 데 신경을 썼고,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 내용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범답안인 양, 그때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대우받고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의 잔상이 지금에 와서 사람들 간의 인내심이 결여되고, 배려심이 부족하여 이타심이라는 단어는 무색하게 되어버린 듯하다.
집안에서 아버지가 힘주어 쟁취를 교육했다면, 그나마 어머니들은 착해라, 순해라, 남을 생각해라라는 교육을 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당시의 아버지들은 회사 생활이 전부였다. 지금과 같이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 ~12시간 근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오직 관심은 직장 내 업무와 뉴스였다. 반면, 어머니들은 주부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살았고, 그 속에서 인간 대 인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당시에 여자들이 모여봤자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가장 인간적 네트워킹을 많이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아버지들도 네트워킹을 했었다. 하지만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했기 때문에 항상 위아래가 존재하여 획일적이고 답이 나와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 어머니들 네트워크는, 사택에 사는 가정주부를 제외하고, 계급을 따지는 조직도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 서로 만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다양한 사람들을 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가 잘났네보다는 내가 양보하는 것이 남들과의 관계에서 크게 손실을 보지 않는 행동이라 여겼을 것이다. 즉, 배려심이 오히려 나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깨달았다고 본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거나 독불장군과 같이 강하면 퇴보될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생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상대로부터 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배려심과 같은 넉넉한 마음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라 본다.
예전에는
누군가 잘못을 하면 뭐라 하고, 잘잘못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서로가 도우며 살았다.
누군가 싸우면 말리면서 서로가 더 친해졌었다.
또 누군가 나에게 선심을 쓰면 의심 없이 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 잘못을 해도 뭐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가해자가 되거나 제2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움을 청해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으며 도움을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할 수 있다.
누군가 싸우더라도 말릴 수 없다. 말리다 폭행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선심을 쓰더라도 의심해야 한다. 가끔은 그 선심이 함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어떤 혹자는 남에게 관여하지 않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이타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타심 기준 또한 시대에 따라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배려라면 이 또한 충분히 이타심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유야 어쨌든 요즘 세상은 이타심이 매우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반비례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버스를 탈 때, 노인분이 타시면 기본적으로 자리를 양보한다. 그런데 요즘은 자리를 양보하면 신기하다는 듯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