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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Oct 05. 2022

꽃 수다

나는 백일홍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 자라섬에는 백일홍이 만발했다. 강바람과 산바람을 누리며 울긋불긋 가을 볕에 그을은 빛깔로 꽃천지를 이루었다. 색깔도 모양도 흔한 꽃의 전형으로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여리기보다는 든든한 자태가, 건강한 중년의 아낙네를 떠올려 준다. 그래서 결정했다. 나는 백일홍인 걸로.


꽃에 대한 내 태도는 다소 경박했다. 문외한으로서 통칭하여, 꽃이 아름다운 건 '당연하지'라고. 이에 견주어, 꽃마다 고유한 이름을 기억하며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바람을 쏘여주는 정성을 들이는 누군가의 마음은 얼마나 신실한가.

모든 생명은 꽃이라 했다. 시인이나 예술가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이 꽃을 노래하고 사랑한다.

분주한 삶을 지나온 이맘때, 허허로운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자연 속 꽃과 나무들이다. 꽃을 보는 내 눈도 점점 그윽해진다.


앗, 채송화다. 이게 얼마만이야! 근교에 사는 친지네 집 마당에서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동으로 무릎을 접고 등을 납작 기울여 땅 가까이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 작은 채송화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꽃송이도 나도 한들한들 싱글벙글 반가움에 들떠 야단법석이 났다. 내 마음이 그랬다.

집 안팎이 마당이던 시절, 흙장난과 소꿉놀이하며 놀던 그때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꽃이었다. 우리 집 마당 꽃밭에도 채송화가 풍성했다. 아침에 문밖을 나설 때나 놀이에 지쳐 집에 들어설 때는 물론, 시무룩할 때도 즐거울 때도 늘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집도 담장도 낮았던 그때, 어린 내 눈높이에 딱 맞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거다. 앙증맞은 꽃송이 속에서 때꾸정물에 얼룩진 꼬마 아이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몸도 마음도 쑥쑥 자라면서 내 눈높이는 자연스레 땅에서 멀어졌다. 동시에 급속한 도시화로 흙이 없는 생활환경에 익숙해 진지도 한참이다. 대신 공원이나 아파트 베란다, 사무실, 카페 등 잘 조성된 공간에서 맵시 있는 관상용 식물과 화려한 꽃들을 눈요기하며 삭막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작은 풀꽃들은, 채송화는 사라졌다.


마당에서 뜻밖의 해후는 마음 깊숙이 가라앉은 추억들을 낚아 올렸다.

해바라기는 채송화만큼이나 반갑고 정다운 꽃이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하면 떠오르는 꽃. 아이들 도화지 그림 속에 영락없이 등장해서 빠지면 섭섭할 만큼 친숙했다. 담장을 넘나들도록 시원하게 쭉 뻗은 꺽다리 키에 걸맞은 크고 둥근 얼굴과  수수한 잎사귀. 개구쟁이들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이 정도 단순 명쾌한 기상은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관상용 해바라기는 내게 진짜가 아니다. 한적한 시골길 울타리에서 명랑하게 서 있는 진짜 해바라기를 만나면, 또 무슨 놀이를 할까 궁리하던 개구쟁이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중학생 때 교정은 아름다운 장미동산이 유명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도 집으로 곧장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장미동산은 사춘기 소녀들의 놀이터였다. 오래된 앨범 속 단발머리 소녀가 장미 송이들 틈에 끼어 꽃처럼 웃고 있다. 고민 많던 고등학생 시절, 재잘대던 그 벤치 위로 늘어진 꽃송이가 흔들릴 때마다 풍겨오는 라일락 향기는 또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언니 집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여기저기 가을바람이 닿는 곳마다 흩뿌려지는 코스모스가 번식력이 너무 강해서 언니는 무척 성가시다고 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내게 코스모스는 엄마 꽃이다. 가을 성묘길, 엄마가 누운 언덕을 향한 오솔길에서는 늘 코스모스가 우리를 마중했다. 긴 시간 걸음으로 지루하고 다리도 아플 즈음, 어김없이 그곳에 피어 있었다. 한껏 두 팔 벌려 재촉하는 손길처럼 양쪽으로 늘어선 코스모스 사잇길을 걷노라면, 엄마 품에 안기는듯 가슴 한가운데가 뜨끈해지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논둑길에 띄엄띄엄 서 있는 미류나무 가지 끝에도, 휘영청 수양버들 그늘 아래도, 나풀거리는 포플러 이파리에도 그리운 이들 모습이 맺혀 있다.


꽃 수다가 끝이 없다. 꽃 투성이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름다움에는 이야기가 살아 숨쉰다. 꽃말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며 '소망'이며 '행복'  사람들의 바람이 꽃마다 다. 저마다의 삶을 꽃 속 새겨 아름답게 채색한다. 기억 속 꽃밭을 거닐며 그리운 날들추억하듯이.

삶의 궤적이 길어질수록 이야기도 겹겹이 쌓여간다. 어디 고운 결뿐이랴. 아픔과 슬픔, 어리석음에 할퀴어진 날들도 낙엽처럼 쌓인다. 그조차도 세월 속에 곰삭으며 언젠가는 아름다운 향기로 피어날 것을 믿는다. 꽃을 사랑하는 신실한 마음으로.


문외한인 내게도, 고유한 이름과 함께 나만의 이야기를 품은 꽃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재미가 생겼. 세월이 흐를수록 풍성해질 마음의 꽃밭을 상상한다. 어제는 백일홍이, 다음엔 또 어떤 꽃이 내게로 올까?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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