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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Sep 16. 2021

왜 사느냐 묻거든

그때 그 어른이 지금 내 모습으로

언니가 10대 사춘기 소녀였을 때,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난 나이 먹기 싫어. 마흔 살이 넘으면 죽어버릴 거야.” 허공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말하는 언니의 옆얼굴이 슬퍼 보였다. 아니 뜻밖의 그 말에 갑자기 내가 덜컥 슬퍼졌던 것 같기도 하다. 푸른 초원을 구르다가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선 듯한 느낌. 믿고 의지하던 언니에게서 삶에 대한 흑빛 절망 같은 걸 엿본 날,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영원할 것만 같던 어린 시절이 끝나갈 그 무렵, 언니의 충격적인 다짐은  내게 깨달음을 줬다. ‘나도 언젠가는 (동화 속 공주나 왕자가 아닌) 어른이 되는구나.’  

    


할머니는 늘 쌀과 연탄 걱정을 했다. 많은 식솔을 거둬야 했기에, 지하실 곳간이 비어갈수록 할머니 이마의 주름살은 깊어졌다. 어쩌다가 꽉 차도록 쌀과 연탄을 들이는 날에는 모처럼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할머니 행복의 열쇠는 지하실 창고에 있는 것 같았다.

옆집 싸낙배기 아이네 엄마 아빠는 날이면 날마다 동네가 떠나가라 요란하게 부수며 싸웠다. 아랫방 아줌마는 어린 꼬맹이들을 우리에게 맡기고, 짙은 화장에 뾰족구두 차림으로 밤늦도록 돌아다니다가 아저씨한테 들켜서는 수시로 얻어맞았다. 윗집 언니네 아버지는 건강도 좋지 않은데 추운 겨울에도 귀마개를 하고 빨개진 얼굴로 포장마차를 끌며 호떡을 구워 팔았다. 어떤 아저씨는 낮부터 술에 절어 툭하면 신세타령에, 걸핏하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었다.


부러움의 대상인 집도 있었다. 골목 끝에서 가게를 하는 아줌마 아저씨네였다. 동네에서 착하고 부지런하고 똑똑하다고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그 집 딸은 나보다 한 살 위 언니인데, 마음씨도 곱고 예뻤다. 늘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머리핀을 꽂고 다녔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일찍부터 하품을 하며 부산스레 가게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는 부부의 모습은 여간 고달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도심 변두리 달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은 죄다 거기서 거기였다. 남루한 매무새에 주름진 얼굴. 어른들은 늘 손끝이 새까매지도록 일을 하고, 한가할 때면 무언가 걱정거리에 휩싸여 있었다. 얼마간의 웃음과 멋도 풍류도 초라하고 시시해 보였다.


그나마 우러러 보이는 어른의 모습이라면 선생님들이 그랬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은 너무 근엄하고 훌륭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교회 선생님은 또 너무 천사 같아서 이 또한 닮을 자신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싼 어른들, 볼품없고 피곤한 저들의 삶이 내 미래일 수도 있구나 싶다가 ‘아냐, 나는 좀 달라’ 통쾌한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꿈도 꿨다. 체념과 바람을 뒤섞으며 나의 어른 됨을 상상했다.     

어른의 삶이란 종착역에 닿는 것이라 짐작했다. 정지하고 박제된 정물이나 완성된 그림처럼 정돈된 일상을 살아가는 것, 흔들림 없는 고정불변의 정답을 살아가는 것이라 믿었다. 주변에 보이는 어른들이란 온통 초라한 종착역의 형편없는 그림 속 불량 주인공들뿐이었지만.     



할머니 장례를 지내고 돌아온 어느 날 유치원생이던 아이가 무겁게 물었다. 엄마, 할머니는 왜 돌아가셨어? 나이가 너무 많아 늙어서 돌아가셨지. 엄마도 늙으면 죽어? 당연하지.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어.

평범하고 담담한 대화였다. 그런데 아이는 곧 울먹였다. 이유인즉, 죽는 것도 슬프지만,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가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게 더 무섭고 슬프다고.

무심한 내 말에 상처를 입었다니 당황스러웠다. 장난처럼 얼버무리며 아이를 달랬지만, 그때 내 아이도 나를 보며 느꼈을까? 마음 한 축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동네 조무래기 아이들과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나는 가끔 한 500년쯤 늙은 나무가 된 기분이 든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왜 사느냐고 묻는 것 같다. 어른이기를 거부했던 그 옛날 사춘기 소녀들,  울먹이던 내 아이에게 이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철없던 소년기와 빛나는 청춘을 쏜살같이 타고 넘어 어느새, 50대 중년의 고갯마루에서 밭은 숨을 내뱉고 있는 나. 세월의 베일이 낱낱이 벗겨지고 있지만, 그곳에 감춰진 삶의 비법이나 정답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빼면, 정해진 건 하나도 없다. 근본 모를 두려움과 불안이 여전히 으르렁댄다. 지나온 길은 엉클어진 채 발목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창창해 보이던 미래는 안갯속으로 아스라이 자취를 감췄다. 세상과 내가 부조화한 채 어색한 관계인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능수능란한 척 연기만 제법 늘었다.

     

설마 그뿐일까.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으려 삶의 잔재를 뒤적인다. 살아온 길이만큼이나 오류가 쌓이지만 그걸 보듬는 지혜도 조금은 자랐을까? 총명하던 눈빛이 쇠퇴하는 대신 마음의 시력은 조금씩 밝아온다. 산다는 것은 문제 해결의 종착역이 아니라,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면서 이어지는 간이 정거장이다. 세상은 점점 더 깊고 넓어진다. 몸은 앙상하게 늙어가지만, 마음은 무성한 아름드리 성장을 꿈꾼다.

 

김 명리 시인은 산문집 《단풍 객잔》에서 과거에 두 번이나 삶을 내던지려는 시도를 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근본을 깨달았다고다. 작가네 집에 드나드는 떠돌이 고양이와 멍멍이들을 돌보고 먹여야 하는 것. 바로 사랑이 그 이유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던가.

어릴 때 만난 이웃 어른들, 현실 속 보잘것없는 등장인물을 사는 우리는 모두 사랑하고자 고군분투했구나. 짙어진 주름, 삶의 낡은 그림은 죽음 아닌 사랑의 징표인 것이다. 모든 삶의 몸짓은 곧 사랑으로 귀결된다.


죽겠다던 언니는 60을 바라보며 아직도 버젓이 잘만 산다.      


제법 그럴듯한 변명거리다.

왜 사느냐 묻거든, 사랑 그 징한 것 때문이라고.




이미지 출처 :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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