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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호 Mar 25. 2024

크로스핏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7

2024 Crossfit Open

2024년 Crossfit Open(이하 오픈)이 끝났다. 1년을 기다린 전 세계 크로스피터들의 축제가 이렇게 또 스쳐 지나가버렸다. 아쉽고 아쉬워서 이에 관해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 오픈 기간 동안 느꼈던 감정들, 마지막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피터들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전율 가득한 순간에 대해서는 기억만으로 담아두기에는 아쉽다. 이 과정들은 기억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당연하게도 그 대우란 나에게는 기록(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1. 기다림과 등록

오픈이 시작되기 전 작년 첫 참가 후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려보았다. 1년간 열심히 훈련해서 24년 오픈에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이후 박스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고 서로를 응원했던 순간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심박수가 올라갔다. 핸드폰에 저장된 1년 묵은 오픈 와드 영상과 사진을 볼 때면 손에 땀이 났다. 그런데 문득 과연 1년 동안 성장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분명 실력은 조금이라도 늘었을 것 같은데 오픈이 다가올수록 확신보다는 의심이 커지는 것 같았다. 자신을 의심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그래서 최대한 준비한 만큼만 열심히 하자고 자신을 다독이고 부상 없는 완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기로 생각한 것처럼.


오픈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 크로스핏 공식 홈페이지에서 대회 신청을 마치고 기념 티셔츠까지 구매하니 정말 오픈이 곧 시작된다는 게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날짜를 바라보며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는 순간들이 차례대로 왔다 갔다. 이 정도면 크로스피터들의 축제라고 쓰고 수능이라고 읽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많은 피터들이 나처럼 부담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설렘을 더 많이 느꼈던 쪽에 가깝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49:51 정도.

제품 가격 보다 배송비가 더 비쌌던 2024 오픈 기념 티셔츠, 디자인은 마음에 든다.


2. 오픈 시작

첫 오픈 와드가 발표된 3/1일(한국날짜 기준)부터 약 3주 동안 거의 매 순간 오픈 와드를 생각하며 지냈다. 어떤 동작이 나올지 예측하기도 하고 어떤 동작이 나오지 말기를 바라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동작은 꼭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꼭 나왔으면 하는 동작이 그토록 적은 것이 참으로 애석한 점이다). 


나는 바벨을 쓰는 동작들보다 덤벨이나 맨몸 운동에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는데 이번 오픈 와드 3개는 다행히 내게 비교적 덜 부담되는 동작들이 출제되었다. 덤벨 스내치, 버피, 로잉, 데드리프트, 더블언더, 쓰러스터, 체투바, 머슬업 총 8가지 동작이 3개의 와드로 짜여 출제되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해볼 만해 보이는데 몇 가지를 섞어놓으면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금세 느끼게 해 준다. 정상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산일 지라도 멀리서 보면 낮아 보인다. 단숨에 오르겠지라고 생각하며 이번 오픈 와드를 멀리서 보고 내심 안도했다. 


오픈 와드가 공개되면 사람들과 와드를 공략하기 위해 전략을 공유하고 서로의 측정을 돕고 자신의 측정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대충 하자고 말하고 진짜 대충 하는 크로스피터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열렬히 응원하고 곧이어 내가 그러한 응원을 넘겨받는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이 에너지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이내 흠뻑 젖어 있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역시 하길 잘했어'.


이내 측정이 끝나고 바닥에 숨을 헐떡이며 나뒹군다. 목에서 쇠 맛이 느껴진다. 귀는 잘 들리지 않고 눈은 어딜 보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분명 뜨고 있는데도). 들숨과 날숨 외에 내게 허락된 건 없는 것 같다. 와드 전에 물통을 왜 이리 멀리 갖다 놓았을까. 제발 누가 물 좀 갖다 줬으면 좋겠다.

기록지에 적힌 내 기록을 확인하고 서명을 한다. 서명하는 것까지가 와드였다면 나는 완주를 할 수 있었을까. 서명인 것처럼 보이는 아무 글자를 겨우 휘갈기고 기록지를 받아 들고 구석에 앉아 나머지 숨을 내쉰다(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이 종이 한 장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이게 오픈이었지. 머쓱하게 웃음이 난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뭔가가 엄청 흐르는데 이를 닦는 힘마저 아끼고 싶다.   


정신이 들면 아직 측정을 기다리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내가 받았던 에너지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분명 넘겨주었는데도 나에게 그대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내가 크로스핏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다시금 찾는다. 

출처: Invictus Fitness

3. 오픈 후

어떤 선수는 자신이 정한 기준 이상을 달성하여 흡족한 결과를 내기도 하고 어떤 선수는 그렇지 못한다. 한 번만 측정하는 선수가 있고 같은 와드를 2번 이상 측정하는 선수도 있다.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평소보다 더욱 힘을 받는 선수가 있고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선수가 있다. 측정이 끝나면 곧장 사람들과 후련한 마음을 들고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축제를 만끽하는 선수가 있고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축제를 조금 더 의식적으로 성스럽게 보내는 선수가 있다. 오픈 결과를 곧장 SNS에 올리는 선수가 있고 기록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측정의 순간을 되뇌는 선수가 있다. 어떤 선수는 웃고 어떤 이는 눈물을 훔친다.  

모두 내 이야기다. 


오픈이 끝나고 흥분된 마음을 식히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곧장 뭔가를 써 내려가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할 말을 기어코 찾았다. 


고생 많으셨어요. 

다친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응원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예정입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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