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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Apr 13. 2021

어느 겨울, 장난 전화가 내게 남긴 것

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한 우주를 헤아리는 일

2주 연달아 토요일 늦은 오후만 되면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면 금세 수화음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면 상대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호흡을 삼키며 조급하게 끊었다. 9871로 끝나던 번호는 8910으로 금세 바뀐다. 두 번호는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걸어왔다. 용건도 의미도 없는 번복된 전화에 불현듯 어떤 경우의 수가 생각난 건 우연이었을까.   

 

작년 담임을 맡았던 4학년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교사 7년 차에 접어드니 뒷골이 서늘한 직감은 맞아 들어갔다. 아니 더이상 내게 직감은 무르고 어설픈 감각의 영역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기 전 수화기 너머 멀리서 희미하게 묻어 나온 웃음소리에 작년 1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이건 확신이 뭍어난 직감이자 마주하고 싶지 않은 합리적 의심이었다. 1번부터 차례대로 훑어 내린 핸드폰 뒷번호에서 익숙한 번호 두 개가 보인다. 9871 김수민 8910 신준영. 멀리 밀어내고 싶었던 그 녀석들이 또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떠난 지 일년이 다 되어갔지만 작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도리질을 치기 바빴다. 교실에서 준영은 하루도 빠짐없이 다스리지 못할 분노를 쏟아냈고, 체구가 큰 수민은 걸핏하면 몸으로 거칠게 친구를 다뤘다. 매일 전쟁 같았던 시간을 보내고 몸과 마음이 지쳐 다른 학교로 도망치듯 떠난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멈출 줄 모르는 전화를 끄고 문자를 보냈다. "김수민, 신준영 장난전화 그만하세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가요?" 정체를 들킨 상대는 몇 분을 고심하다 답장을 보냈다.


"선생님이 싫었으니까요."    


서로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더라도 1년은 충분히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연하게 문자에 찍힌 '싫다'는 말은 여전히 날카롭고 아팠다. 쿵쾅대는 심장이 본래 리듬을 찾을 때까지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화면을 껐다. 이미 지난 일을 떠올리고 싶지도 다시 그 녀석들과 엮이기도 싫었다. 다만, 눈을 감으니 선명히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학교를 마치고 데려다준 준영의 아파트 복도가 너무 깜깜했던 기억이, 수업 마치고 쭈뼛대면서 말을 걸었던 수민이 떠올랐다. 하필 제일 냉정해야 할 때 처리하지도 못할 감정 더미들을 마주했다.  

   

끝자리 9871로 전화를 걸었다. 코로나로 학교가 다시 닫힌 지 한 달째였다. 오후 8시가 넘어가는 시간, 고된 일 탓에 밤 12시 넘어서 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녀석들은 방구석에 모여 폰 게임에 몰두해있을 게 분명했다. 11살이 감당해야 할 몫은 집집마다 다르다지만 부모님이 늦게까지 밥벌이를 하는 동안 준영이와 수민이는 밥부터 모든 걸 오롯이 혼자 챙겨야 했다. 기나긴 수화음 끝에 수민이 받았다. 오랜만에 밥 먹었냐는 인사를 수화기 너머로 건넸다. 무거운 침묵 끝에 먼저 내가 말을 꺼냈다.     


감정은 의외로 막연하지만은 않다. 단편적인 사실들의 집합체였다. 수민과 곁에 있던 준영은 천천히 마음속 이야기들을 내놓았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수민과 준영에게 좀 더 욕심내서 다가가려던 말과 행동은 11살이 감당하지 못할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2시간 넘게 싫었고 싫었던 이야기를 듣고 들었다. 그건 나만 간직했던 좋았고 좋았던 이야기로 간편하게 상쇄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용기 내서 말해줘서 고맙단 인사를 건넸다. 하루는 너무 짧았기에 며칠 동안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때는 미처 묻지 못했던,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날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해피엔딩이란 없었다. 며칠동안 수화기 너머의 우리는 수차례 짙은 침묵과 생경한 감정을 마주했다. 버텨내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나는 쉽게 "또 연락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고, 수민과 준영은 의례적인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지만 시작보다 홀가분하게 전화를 끝냈다. 장난처럼 찾아온 기나긴 통화를 마치고 남은 건 의외로 지루한 무기력이 아니었다. 편안함이었다. 이제 서로 잘 잊히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상벨 같았던 장난전화를 끊고서야 나는 제대로 된 응답을 할 수 있었다. 수민과 준영에게 내민 손은 너무 조급했다. 묻지 않은 호의는 폭력이었다. '싫다'는 감정을 맨몸으로 받고서야 잘못된 걸 알았다. 교실에서 과욕은 종종 맞은 편에 선 아이를 잊었고 존재에 대한 나의 감각도 무디게 만들었다. "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한 우주를 헤아리는 일"이라면, 우주를 단숨에 이해하기 위한 노련한 방법은 없다. 존재를 속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는 시선만 있을 뿐. 나를 내세우지 않고 오롯이 한 아이의 우주를 보려 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지키며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실은 누군가의 무사한 하루를 지켜주는 곳이어야 했다. 무사한 하루는 안전하고 안락하니까. 누구보다 작년 수민과 준영에게는 날카롭지 않은 그런 교실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리라.    


"안녕하세요"


며칠 전 한 녀석에게 문자가 왔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수민과 준영은 동네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오던 참이라 했다. 밥은 먹었냐는 질문에 과자를 잔뜩 먹어서 배부르다던 수민의 너스레를 보고 잠시 웃는다. 늦지 않게 밥은 챙겨 먹으란 잔소리를 덧붙여 보냈다. 다행히 우린 가끔 안녕을 묻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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