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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스 Aug 31. 2021

걸어야 보이는 것들

또는 자전거를 타야 보이는 것들


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을 조금 바꾸어, 나는 '해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람, 상황, 거리, 길 위의 모든 존재들. 때로는 걸어야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고, 자전거를 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말은 즉슨, 보기 위해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얼마 전엔 기약 없이 걸었다.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별생각 없이 거리를 걸었다. 집에서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짜 내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풍선에 바람을 넣어야 멀리 날아갈  있다고, 그러니 나도 머리에 바람을 넣어야  높이 날아갈  있다며, 나를 풍선에 빗대며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기약 없는 걸음은 머지않아 끝이 났다. 어느 정도 걷다가 눈에 들어온 벤치에서 가만히 앉아 한 움큼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매번 지나던 동네 길목에는 벤치가 하나 있더라. 근처에 놓인 흔들의자에서는 어느 할아버지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당신의 아들딸인지 혹은 친구인지 모를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전화를 하고 계셨는데, 근처에 있던 나도 함께 참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스피커 음량을 크게 틀어놓고 계셨다. 근처에는 나도 있었고, 어느 모녀도 있었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운동족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할아버지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그저 할아버지가 전화를 하고 계시네, 하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곳저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벤치를 일어나 다시 몇 걸음 걷기 시작했다. 내 무릎만치도 오지 않는 작은 크기의 강아지들이 내 옆을 수없이 지나쳤다. 우리나라 인구의 사분의 일이 애견인이라던데, 그 말이 새삼 실감이 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걷는 시장에서는 마침 오일장을 끝내고 제 자리를 정리하시는 상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철수하려 싸 둔 짐 더미 앞에서 서로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인들도 있었다. 장사를 마친 사람들은 더 이상 상인이 아니었다. 그날 본 건 더 많았지만, 다시 기억해보니 생각나는 건 이 정도다. 특별한 건 없었지만, 결국 내가 이 모든 상황과 광경을 스친 건 평소처럼 버스를 탔다면 없었을 일이었다는 게 특별했다.



큰길로 나와 좀 걷다 보니

금방 또 그런 생각이 드네

하늘에 구름이 없는 날들을 본 게

언제 적 일인지


-김목인, 걷다 보니-



그리고 오늘은 한강에 가서 자전거를 탔다. 망원역 부근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망원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한강변에 다다랐다. 망원 한강지구를 지나 상암 나루까지 다다르는 여정이었는데, 한참 오른쪽의 코스이다 보니 여의도의 멋진 건물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풍경이 훌륭했다. 적절히 습도가 높았던 날이라 그런지 어디 따듯한 나라로 여행에 온 건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튼 자전거를 타며 내가 본 건, 나와 맞은편에서 오는 수많은 자전거들이었다. 자전거도로가 마련되어있던 한강변에서도 그랬지만, 망원 골목 사이사이를 오가며 나는 수많은 자전거와 마주했다. 이 거리를 자전거로 오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정말로 많았다.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자전거,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자전거. 늘 걸어 다니던 거리에서는 미처 신경 쓰이지 않던 수많은 자전거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였다.


그러는 와중에 지나친 어느 할머니와 강아지는 나란히 길에 서있었다. 강아지는 큰일을 보고 있었고, 할머니는 옆에서 그런 강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친 반지하 카페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람 셋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 옆을 지나던 내 자전거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살짝 흘깃거리며 본 세상은 제법 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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