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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스 Sep 16. 2021

지하철 자리를 차지하는 법

지하철 인생 n년차, 비로소 깨닫다.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것. 그건 바로 지하철이다. 수도권에 살지만 활동 배경이 거진 서울인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기본값이기도 하다. 내가 타는 경의선은 어마 무시한 배차 간격 덕에 악명이 높지만, 다른 노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음이 적은 탓에 막상 타고 있으면 생각에 깊게 빠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전 9시, 아주 빽빽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앉을자리 따위는 없는 경의선에 몸을 싣고 밖을 바라보았다. 이른 새벽부터 이삿짐 나르는 소리에 깨버려서, 아직도 졸려웠기 때문에 눈을 꿈뻑꿈뻑 감았다 뜨고 있었다. 일산에서 서울로 가는 경의선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사실 아주 정겹다. 특히나 대곡-화전 구간은 논밭의 초록색이 주욱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농활이라도 온 것처럼 내적 안정감을 유지하기에 아주 좋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건 고역이다.) 그렇게 초록색 풍경을 별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내가 서있던 자리 앞에 앉아있던 여자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땡잡았다. 자리 나는구나!'



북적북적이는 출퇴근 시간
정장 교복 할 거 없이 빽빽한

지하철 안에서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지 모두가

북적북적이는 출퇴근 시간
정장 교복 할 거 없이 빽빽한
내가 들어서면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버린 전동차의 풍경
그리고 앉아있는 자의 여유 후후
심하게 조는 자를 향한 야유 후후
지하철은 세상의 축소판


-악동뮤지션, <지하철에서>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여자는 다음 역에서 내렸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남은 20분은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쾌감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쪽잠을 청했다. 도착지에서 내리려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이번엔 내 바로 앞에 서있는 어느 직장 인분이 잽싸게 앉을 준비를 했다. 일어나 내리면서 생각했다. 지하철 자리와 인생은 어쩌면 닮은 구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꽉 찬 지하철에서 앉을자리를 차지하는 건 90%의 운과 9%의 눈치에 달려있다. 남은 1%는 특수한 상황인데, 자신이 노약자가 아니라면 해당되지 않는 사안이다. 운과 눈치가 99%나 차지한다니, 이게 뭔 소리인가 싶지만 지난 수년간 지하철 인생을 살아본 내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다. 먼저 지하철을 탔다고 해서, 혹은 내가 더 오래 서있었다고 해서 자리에 앉아 편히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서있는 바로 앞자리의 사람이 일어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치껏 '조만간 일어날 것 같은 사람' 앞에 가서 서있었다가, 그 사람이 일어나면 잽싸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뿐이다. 그 사이 다른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와 무리하게 자리를 뺏어갈 확률도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운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조만간 일어날 것 같은 사람'은 누구냐. 그건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누가 봐도 가방을 만지작 거리는 사람이나, 차창 밖으로 어떤 곳을 지나고 있는지 흘끔거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오후 정도에 홍대입구와 같이 번화가를 지나는 코스에서는, 차려입거나 조금 꾸민 젊은 청년들이 해당된다. 이른 아침 군 장병들이 많이 탈 때에는, 디엠씨나 서울역 부근에서 대부분 내리므로 그 앞에 서있으면 확률이 더 높아진다. 코로나 전에는 통학 시간대에 대학 이름이 써진 과잠을 입고 있는 사람 앞에 서있는 것도 방법이었다. 해당 대학을 지날 때 그 학생은 반드시 내리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인생도 사실 마찬가지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오래 기다린다 해서 언제나 기회가 내게 떨어지는 건 아니다. 취업도, 사업도, 인간관계도, 누리고 싶은 기회는 많다만, 내 의지와 노력에 걸맞는 결과가 오는 건 몇번 되지 않는다. 어느 날엔 내내 서서 도착지까지 가야하는 것처럼, 어떤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앉을 자리 따위는 누릴 수 없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래저래 쌓아온 N년간의 노하우 덕에, 10번 중에 5번 정도는 앉아서 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지하철을 탈 때에 대충 내릴 것 같은 사람을 스윽 둘러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눈치껏 일어나는 사람의 자리에 연이어 앉을 수 있는 자세도 가졌다. 결국 지하철 자리를 앉듯, 내가 앉고 싶은 또 다른 자리의 기회도 이렇게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90%의 운과 9%의 눈치가 더해져, 매일 지하철을 타듯 인생을 꾸준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맞아떨어지는 때가 와서 내게 원하는 자리를 앉을 '행운'이 떨어질 거라 믿는다. (사실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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