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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디를 자극하는 마술

<말라르메를 만나다> 폴 발레리. 김진하 옮김

by 몽상가

상징주의는 정신적 이상을 추구한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하여 말라르메와 베를렌, 랭보 그리고 발레리로 이어진다. 이들 상징주의에 속하는 주요 시인들은 모더니즘 형성에 공헌하였다. 상징주의는 자연주의 문학과 시에 있어서 조형적인 미의 효과만을 노리는 파르나스파에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전 세대가 배격하던 신비, 꿈, 상징 등과 ‘저주받은 시인들’이었던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말라르메를 계승한 제자가 발레리였고 발레리는 프랑스에서 국장으로 치러질 만큼 대단한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프랑스 상징주의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론서든 시험용으로서든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 전공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고 상징주의 계보와 시인들의 작품 제목만을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말라르메를 숭배하는 입장에서 써진 <말라르메를 만나다>라는 텍스트만으로는 발레리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답답했던 것은 평전일 경우에 한 작가 혹은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인간적인 면모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폴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는 책은 말라르메에게 경도된 한 제자가 회한의 목소리로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다는 인상이 깊어 말라르메나 발레리 중 누구에게로 할 것 없이 마음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직 말라르메에 경도되어 숭배하는 발레리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라르메를 객관적으로 보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무지로 인해 보지 못한 것이 있으리란 생각으로 상징주의 계보와 시인들의 흔적을 따라 말라르메의 작품을 찾아 읽고 발레리의 비평을 읽다가 흥미로운 논문을 보게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와 발레리의 상징적 관련성을 고찰한 논문인데,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발레리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수확이었다.


19세기 시의 엄청난 진화의 중간에 보들레르가 위치한다. 그는 자연적인 진전의 한 과정이 아니고, 의식적이며 탐구적인 모색에 의해 말라르메를 향하여 길을 열어 놓은 획기적인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와의 관계에 있어 두 가지 핵심적이며 근간을 이루는 초석을 제공한다. 하나는 ‘시의 종교’라 할 만한 시의 절대성의 신앙이고, 또 하나는 상징시의 시학이다. 19세기의 서정시는 보들레르에 이르러 전환기를 맞이한다. 시가 곧 신앙의 대상이 되며 시인은 신의 섭리에 의하여 이 세상에 보내져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미의 영원한 구도자로 신앙화한다. 시인이 추구하는 절대의 미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예술의 종교화와 더불어 예술가의 순교자적인 사명과 비극적인 인간조건이 발생한다.


보들레르의 시는 대부분이 교감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도처에서 자연이나 타인과의 교감을 노래한 시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의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의 말을 깨닫는 시인의 경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응相應>에서 노래한 상태가 가능해진다. <상응>에서는 이미 말라르메의 연상, 유추의 연쇄기법이 시구를 강한 밀도로 압축하고 있다. 그에게 시인이란 곧 사물의 언어를 해독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인이 도달한 어떤 경지에서 이루어지며, 사물이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상적인 현상이 아니고 극히 희귀한 순간에만 이루어진다. 그런 영혼의 상태는 마약 같은 불건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기도삼매경이나 몽상할 줄 아는 시인의 영감의 환기 등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초자연의 시적 건강상태에 도달한 행복한 순간에 색, 향 등사물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


말라르메 역시 초기 시에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으나 <에로디아드>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탈보들레르에 들어선다. 후에 발레리 역시 보들레르와는 달리 지적문제를 중시하고 몰두한 결과 창조나 영감, 천재 등 낭만주의가 옹호한 개념들보다 기교를 더 중요시한다, 그것은 그의 고전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말라르메의 기법의 핵심은 암시와 환기에 의해서 독자를 시의 창작에 참여시키는 것, 적어도 재창작하게 하는 점에 있다. 그의 주목적은 암시와 환기의 기법, 암호해독의 방법을 통해 시인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보들레르의 시학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시학을 더욱 철저하고 정교하게 밀고 나가 언어에 있어서도 논리적인 관계사나 연결사를 빼버리고 때로는 명사만을 병렬하거나 뜻밖의 어휘를 연결해 놓기도 한다. 그의 언어는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이 우리 영혼 속에 일으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중개자로서 가장 정확하고 치밀하게 선택된 말들이다. 그 말에 의해서 연상, 유추의 그물이 조금씩 드러나며, 암시된 것이 독자의 영혼 속에 투영된다. 이 시학은 단순한 기법으로 끝나지 않고 절대의 탐구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예술철학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사물을 그리지 않고 사물이 발산하는 효과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를 일반적 의미에서 해방시키고 시어의 배열을 일상적인 규칙과 구문에서 해방시켜 고도의 음악성과 특이한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순수미학을 지향한다. 이상하면서도 절대적인 듯한 그 작품 속에는 마술적인 능력이 들어있어서 지성인들의 삶의 마디를 자극하게 된다.


폴 발레리의 핵심개념인 에스프리는 풍부하면서도 애매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혼이자 정신, 마음이며, 지적 능력이기도 하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개개의 인간이며 또한 때에 따라서는 재기나 기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발레리는 그리스 이래 유럽의 사상을 지배해 온 의식이자 지성으로서의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한다. 그러한 발레리가 말라르메의 마술적 언어에 심취하여 자신의 시집제목 역시 ‘주문’으로 붙였다. 이것은 ‘매혹’으로 번역되어 ‘홀리는 주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발레리가 아무리 말라르메를 숭배하기로 발레리가 거론한 조악한 어느 비평가처럼 나 역시 말라르메의 시를 겉멋 부림, 의미의 빈곤, 난해함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발레리와 나와 조악한 비평가들의 다른 점은 발레리는 말라르메의 고매한 인품과 작품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는 것과 조악한 비평가들과 나는 말라르메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말라르메의 시적인 상징을 보지 못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프랑스어의 병렬구도가 어떤 암호해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프랑스어의 묘미를 살려 언어의 일반적 의미에서 해방된 시어를 배열한 의도를 읽을 수 없는 상태로는 말라르메의 작품을 이해할 수도 없고 더구나 말라르메의 숭배자인 발레리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발레리의 말을 받아들이는 지점은 있다. 시란 확실히 글쓰기나 비평보다 먼저 존재하는 인간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기 때문에 진정한 시인들에게서 아주 오래된 인간을 발견한다는 발레리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하여 발레리는 말라르메에게서 아주 오래된 인간을 보았고 삶의 마디를 자극하는 마술적 언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발레리는 학자로서 말라르메가 사용한 단어에서 일종의 학문을 보았고 시적임무를 보았을 것이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선택된 단어들의 배열과 해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금은 다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바뀔 수도 있다. 오래전 장 자끄 루소의 자연주의를 인정하면서 정신병적 증세를 가진 학자로 몰고 갔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본 루소는 그전과 다르게 다가왔고 아주 오래된 인간으로서 매력적인 인물로 탈바꿈되었다. 말라르메 역시 발레리가 말하는 <말라르메를 말하다>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나의 무지가 걷히면 시각이 변할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기에 번역자 역시 아주 오래전 말라르메의 시를 한 도시에서 한 사람 정도는 기다리고 있을 그때처럼, 창작의 고통에 버금가는 괴로운 번역을 하며 한 도시에서 한 사람 정도는 이 책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바람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발레리를 통해 말라르메의 <에로디아드>, <목신의 오후>, <주사위들 던지기> 등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과 특히 <주사위들 던지기>는 30년간의 번민의 결과이며 백지면의 시각화라는 점과 법칙에 의한 단어적 배열과 방법을 계승한 기욤 아폴리네의 <비가 내리네>를 함께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발레리가 말라르메에게 매혹된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됐다고 말한다면 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으로 인해 그의 명예에 손상을 줄까 겁이 나지만 그 두 사람이 걸었던 길, 학자와 시인의 결합, 철학과 시의 일치. 이 모순의 추구의 지점에 삶의 마디를 자극하는 마술적 언어가 있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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