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5월 15일 24세 Y 일기
오늘은 스승의 날.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들 5명 남짓이 모여 담임 선생님 P를 찾아갔다. 2019년 14살에 만났던 우리는 이제 24살이 되었고, 초임 교사였던 P 선생님은 이제 30대 후반이다. P 선생님은 교사 생활이 처음이었고, 우리는 중학생이 처음이었다. 우리들의 만남은 타이밍이 적절했다. 15살 때는 우리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학교를 등교하지 않는(못하는) 아이들이 넘쳐났고, 우리는 일 년에 등교를 1/3도 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고, 함께 공부하거나 놀 일도 거의 사라졌다. 그 당시는 직접 느끼지 못했지만 많은 것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면서 대학생들도 여러가지 의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가에 대해서. 중2-3학년을 코로나와 함께하던 우리는 중1의 추억만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지역에 있는 대학을 포함하여 여러 대학들이 줄줄이 사라지는 것을 매년 목격했다.
P 선생님은 5-6년에 한 번씩 찾아가는 우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시고,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물어보고 메모를 해두셨고, 우리는 그녀와의 추억이 좋았어서, 그녀가 우리를 기억하고 관심 가지는 것이 좋아서 계속 찾아갔다. 수시로 만나 예전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들에게 종종 이렇게 스승을 찾아가는 행사는 일종의 여행에 가까웠다. 20대가 되어서는 처음 찾아가는 자리라 선생님은 법적으로 성인이 된 우리들의 생활 변화를 궁금해하셨다. 대학을 갔는지, 취업을 했는지 어떤지 등등. 그녀에게 전한 우리들의 상황은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앞뒤 상황이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은 선생님에게 예전에 말했거나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적겠다.
Q: 얘는 지금 직업군인이 되었다. 20살에 바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우리가 19살이 되던 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면서 대거 취업 일자리가 생겨나, 그 당시 운동 꽤 하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소수를 뽑더라도 뽑혔겠지만 뽑는 수가 워낙 많다보니 Q는 어렵지 않게 취업해서 우리들 중 E 다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직업군인 5년차다.
W: W는 대학은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고등학교 내내 대학 입시 준비를 했었다. W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대학입학까지는 부모님 뜻대로 하지만 대학을 가면 집을 나와서 자기 맘대로 살겠다고 거의 매일 우리들에게 이야기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W는 지금 또래 친구 몇몇과 주택건축사 창업을 했다. 고등학생 시절 건축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고 처음에는 $대학(건축으로 그럭저럭 유명하고 취업이 잘된다고 하고 W가 도전하기에 무리가 없어보여서)에 가려 했는데 재정난으로 $대학이 사라졌다. 2, 3순위로 생각해둔 학교도 사라져 결국 고3 말 수능을 칠 때 건축학과가 있는 대학 중 W가 갈 수 있는 곳은 대전에 있는 &대학 뿐이었다. &대학은 많은 학과를 정리하고 건축 중심 특성화 대학으로 일찍 돌아서려 추진, 준비하면서 결과적으로 건축계열에서 살아남는 대학이 되었다.
그러나 W가 생각하기에 건축사무소 등에서 진행하는 건축과목들이 충분히 많고,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인턴제도 있어 대학을 다니는 것은 무의미 했다. 돈을 벌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왜 돈을 쓰면서 배우느냐는 것이었다. W는 &대학 대신 한 건축사무소 인턴으로 들어가 필수 과목을 배우면서 일을 시작했다. W의 대학 준비가 헛수고가 되어버려 우리는 W가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W가 신경써서 공부해온 수학, 물리 등을 인턴 일을 하며 발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노발대발하시던 W 부모님은 다들 대학을 안가고 잘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3년이 지나서야 마음을 좀 비우셨다고 한다. 그래도 W네에서 대학졸업장이 부모님에게만 있어서 어머니는 가끔 속상한 마음을 소리로 내지르신다고 한다. 그놈의 종이쪼가리가 뭐라고.. 오해말라. 내 말이 아니라 W가 자주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들이 나이 들어 살게될 주택은 W에게 맡기기로 결론지었고, 우리는 W의 지금을 매우 만족스럽게 보고 있다.
E: 얘는 우리 중에 가장 빠르다. P 선생님도 전에 찾아뵈었을 때 들어서 알지만 그녀는 고등학교도 가지 않았다. 검정고시 준비로 자격을 얻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중2, 3학년 시절은 코로나라는 감염 질병으로 인해 화상학습이 주를 이루었다. 비대면 수업을 반복하면서 E는 혼자 공부하는 것이 생각보다 자신에게 잘 맞다는 것을 느꼈다. 2년 동안 거의 혼자 공부하다시피 지냈는데 고등학교 과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입학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는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의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다들 부러워했다. E에게는 일찍부터 자기 확신이 있었다.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신감 말이다.
E는 1년 만에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안가는 대신 부모님 가게(중국집인데 탕수육이 이 가게를 먹여살린다.)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18살부터는 운전면허를 따고 배달을 다니고, 혼자 여행도 많이 다녀 우리의 부러움을 한 번에 받았다. 여기까지가 P선생님이 아는 소식이고 E는 현재 부모님 가게를 프랜차이즈로 성장시켜 분점을 운영하고 있다. 총 3개를 운영 중인데 E 말로는 5년 뒤에 2배 이상 규모를 키울 것이란다. 그녀는 우리 중 돈을 제일 잘 번다.
R: R은 우리 중 유일하게 대학을 갔다. 코로나 이후 감염병과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들도 그런 류의 매체를 자주 접했고, R은 집에서 뒹굴거리다 평소 보지 않던 다큐(기후위기 관련)를 보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기로 말이다. 그는 처음에 환경운동가가 되어 다큐를 제작하거나 플라스틱 사용 반대 운동 같은 것을 하려 했다. 중1 때는 분명 우리 모두 놀기 바빴고, 그 중 R이 가장 놀기 바빴는데 그때 많이 놀아서 그런가 애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공부를 미친 듯이 좋아했다. 과학처럼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그랬지만. 어쨌든 이 아이는 지금 환경문제 해결학과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여러 학습을 하고, 올해 대학원에 입학하여 바이러스학과와 연합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얘는 언젠가 큰일을 해낼 것이다.
선생님은 요즘 대학이 연구 중심 활동이 아니면 효용 가치가 많이 떨어진다며, 연구 활동을 원하는 R이 대학에 간 것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대학에서 자신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꽤 근사해 보였다. 대학이 사라지면서 국가지원 대학이 좀 더 탄탄해진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Y(나): 나는 파고들고 싶은 분야도 없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항상 ‘알아서 하라’로 했다. 대신 ‘21살’부터는 ‘나가서’ 알아서 살아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고, 설마 준비가 안되었는데 쫒아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무 터치하지 않는 부모님이 점점 부담이 되었다. 가끔 독립 계획을 물어오는 부모님에게 아무 말이나 둘러대다가 19살이 되자 슬금슬금 압박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직업군인이 되는 Q를 따라 가보려 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이 운동이었던 터라 몇 번 해보다 바로 포기했다. E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려면 하라고 했지만 그 당시는 자리가 필요한 것 아닌 것 같았고, W나 R처럼 대학에 갈 생각도 없어 걱정이 되었다. 뭘하지? 돈을 얼마나 벌어야 독립해서 살 수 있지?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들이 패션 관련 온라인 창구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내가 패션 제안을 잘 해준다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 한마디에 무작정 시작한 것이 굉장히 무모했다 싶지만 그 덕에 나는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했다. 패션을 조언해주는 화상 어플을 운영하면서 패션 관련 모임, 전시, 출판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엔 이걸 수익이라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21살에 최저생계비 달성, 지금은 저축도 정기적으로 하고 인지도도 꽤 생겼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삶도 굉장히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교사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항상 베풀어도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닌 것 같다. 대학이 이렇게 사라지고, 우리들도 5명에 1명 꼴로 대학을 가는 것처럼 학교도 수많은 사회변화에 맞딱 들이고 있고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었다. 우리들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선생님께 식사를 대접했다. 앞으로 좀 더 자주 찾아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