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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장에 다닙니다.

1.

by 지하

내가 20대 후반에 태권도장에 등록하게 된 이유는 전혀 거창하지 않았다.


성인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 힘든 이유는 쪼렙인 자신을 견디지 못해서라고 했던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못하는 것엔 익숙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흰띠를 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태권도였다.


비록 17년 전에 울면서 가까스로 취득했던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태권도 1품이란 말이다.


태권도 단증이 얼마나 너그러운 자격증인지 아는가?

꼴랑 2년이면 아무리 높은 점수여도 소용없게 만드는 타 자격증들과는 달리 한번 취득하면 평생 유효하다.


원본도 필요 없었다. 국기원 사이트에 들어가 개인정보를 입력하니 내 정보가 남아있었다.

돈만 내면 품(미성년자)에서 단(성인)으로 곧바로 전환도 가능했다.


쥐꼬리지만 돈을 버는 사회인은 곧장 등기우편 옵션을 결제해 단증을 획득했다.


이제 태권도장에 등록하기만 하면 된다.


*


등록할 태권도장을 찾는 것이 단증을 사는 것보다 어려웠다.


분명 동네에 널린 것이 태권도장인데도 말이다.


지도어플로 회사 근처를 지정하고 태권도장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8개가 나왔지만

상호명부터 어린이, 키즈가 들어간 곳을 빼고 나니 다섯 곳이 남았다.

차례로 전화를 걸어 성인부가 있냐고 물었는데 성인은 안받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마지막 한 군데에서 성인을 받긴 한다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썩 맘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


운동과 담쌓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체력이 약했다.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다.

바깥놀이엔 관심도 없었고 실내에서 노는 게 더 좋았다.

실내에서 책을 읽다가 눈이 나빠져서 8살 때부터 안경을 썼고, 안경을 쓰니 운동과 더 멀어졌다.


체육시간의 절반은 보건실에서 보냈으며

체력장은 늘 가장 낮은 등급, 운동회날에는 단체 줄다리기 딱 한 종목 참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 다른 방면에선 오기를 부리기도 했으나

운동에는 승부욕조차 들지 않았다. 원래 못했고, 잘할 거란 기대도 없었으니까.


열 살에 태권도장을 등록했던 것도 당연히 내 의지가 아니었다.


제발 나가 놀라며 억지로 사준 자전거와 롤러브레이드가 거의 새것인 상태로 세 살 아래 동생에게로 넘어갔다.


아이들의 장난으로 인해 울면서 하교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엄마는 최소한 밖에서는 울지 말라고 했고 그 뒤로부터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엉엉 울었다.


유독 얌전한 앤 가보다 싶었던 부모님도 이쯤 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고

결국 엄마손에 이끌려 태권도장에 등록하게 되었다.


엄마는 1품만 따면 태권도장을 그만두게 해 준다고 했고, 나는 1품을 따자마자 그만뒀다.

1품이면 배워야 하는 고려 품새를 시작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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